리디아, 이번에는 진짜 얘기만 듣고 올게 — 엘더스크롤 V: 스카이림

어쨌든 가고는 있다고. 다만 아주 조금 오래 걸릴 뿐이라고.

먼 산 위의 수도원으로 이어진 눈 덮인 돌계단을 오르는 두 여행자
The Long Way to Lunch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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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카이림》 본편의 주요 퀘스트와 파써낙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얻어먹었으니까 이것만

덜컹거리는 진동에 눈을 떴다. 마차 안이었다. 맞은편 남자가 이제야 정신이 드느냐며 말을 건넸다. 꽤 오래 기절해 있었던 모양이지만 일찍 깬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묶여 있는 내 양손이나 곁에 앉은 이들의 몰골을 보면 말이다.

앞자리의 남자는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쉼 없이 토로하고 있었다. 나 역시 일단은 그 의견에 동의했다. 무슨 일로 끌려가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사람을 묶어 놓고 시작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두 손이 묶인 시점에서 바라본 마차 안의 두 남자와 눈 덮인 숲

헬겐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어디로 끌려가는 중인지 알았다. 사형장이었다. 눈을 좀 더 감고 있을 걸 그랬다.

명단을 확인하던 병사가 내 이름을 찾지 못했다. 나는 슬쩍 허리를 폈다. 그렇지.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겠지. 이제 나를 풀어주고, 서로 조금 멋쩍게 웃고, 나는 저 문으로 걸어 나가면 된다.

담당자는 그냥 같이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저기, 없다고 하는데요. 제 이름이.”

병사가 나를 줄 쪽으로 떠밀었다. 명단을 다시 확인해 보자는 말을 하려는데, 앞서 도망치던 남자가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순순히 줄을 섰다. 다른 방법은 줄을 선 채로 생각하기로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이제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용이 나타났다.

용을 보고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구나. 나는 처형대에 목을 댄 채 하마터면 환호할 뻔했다. 방금 전까지 내 목을 치려던 자들이 용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괜한 짓 말라고 말려주고 싶었지만, 용이 나에게까지 골고루 불을 뿜기 시작했으므로 응원은 곧바로 취소했다.

일단 일어나서 뛰었다. 누군가 탑으로 들어오라고 소리쳤고, 나는 안으로 뛰어들며 이쪽이 맞느냐고 물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벽이 무너져 내렸다. 마침 길을 아는 것처럼 내달리는 사람이 있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동굴을 빠져나왔을 때 내 손에는 무기가 들려 있었다. 몸에는 남의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사형수에서 무장한 실업자가 되었다. 살아 있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진전이었다.

리버우드 사람들은 선뜻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내주었다. 든든하게 밥을 먹고 나니 세상이 조금은 괜찮아 보였다. 그들은 내게 용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화이트런의 영주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가서 말씀만 드리면 되는 거죠?”

마을에 병사가 부족하다는 말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어차피 앞으로 어디서 먹고살지 알아봐야 할 테니 큰 도시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덤으로 얻어먹은 밥값까지 한 번에 치르는 셈이었다.

출발 전에 상점에 들렀다. 상인은 황금 발톱을 도둑맞았다고 하소연했다. ‘황금’이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해져 조금 더 캐물었다. 도둑은 산 위의 무덤으로 향했다고 했다. 어느 산인지 묻기만 했을 뿐인데, 상인은 벌써 내 손에 발톱이 들려 있는 것처럼 고마워했다.

“아직 찾아주겠다는 건 아니고요. 위치가 궁금해서.”

그가 보상도 하겠다고 덧붙였다.

“얼마나요?”

밖으로 나와 지도를 펼쳤다. 할 일이 두 개로 늘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하나였는데. 발톱은 가는 길을 봐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우선 지도에 위치만 표시했다. 표시한다고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같은 무덤인데

화이트런 영주에게 용 이야기를 전했다. 영주가 마을에 병사를 보내겠다고 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밥값은 충분히 했다. 돌아서려는데 영주가 나를 마법사에게 데려갔다. 마법사는 무덤에 있는 석판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시키는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명을 다 마친 뒤에도 그는 계속 나만 쳐다봤다.

“제가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그렇다고 했다. 나는 체념하고 무덤 이름을 물었다. 펼쳐본 지도에는 이미 그곳이 표시되어 있었다. 황금 발톱을 찾으러 가야 하는 바로 그 무덤이었다.

이건 꽤 수지맞는 일이었다. 한 번 던전에 들어가서 두 사람에게 보상을 받는 셈이니까. 발톱만 찾으러 무작정 갔더라면 같은 길을 또 올라갈 뻔했다. 화이트런에 먼저 들르길 정말 잘했다.

칼과 방패를 단단히 챙겼다. 좁은 무덤 안에서는 앞을 막아가며 싸우면 될 것 같았다. 허공에 칼을 몇 번 휘둘러 보니 제법 믿음직했다.

무덤으로 들어가려다 입구에서부터 화살을 맞았다.

일단 몸을 숨긴 채 상처를 치료하고 바위 뒤에 주저앉았다. 위에서는 산적들이 이쪽을 찾고 있었다. 놈들은 높은 곳에 있었고 나는 아래에 있었다. 내 검술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시작하는 자리가 불공평했을 뿐이다.

마침 아까 주워 둔 활이 있어 꺼내 들었다. 입구를 지키는 놈들 머릿수만 조금 줄이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전사라고 지형을 이용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나. 방패를 들었다고 평생 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웅크려 앉은 채 활을 쐈다. 산적이 두리번거렸다. 한 발 더 쐈다. 훌륭했다. 적어도 내 몸에 구멍이 더 생기지는 않았으니.

내부에 진입해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놈들의 수를 꽤 줄였다. 문 앞에서도 앉았고, 모퉁이를 돌기 전에도 앉았다. 나중에는 문만 보이면 반사적으로 무릎이 먼저 굽혀졌다. 아, 칼은 잘 차고 다녔다. 길을 막는 거미줄을 자를 때 제법 유용했으니까.

거대한 거미를 해치우고 나자 거미줄에 묶인 남자가 풀어 달라고 애원했다. 발톱의 행방을 아는 눈치였다. 우선 꺼내 주고 얘기하자고 하니 그는 연신 고맙다고 했다.

풀어 주자마자 달아났다.

“아니, 얘기는 하고 가야지!”

나는 곧장 뒤를 쫓았다. 녀석이 발톱을 챙겨 달아난 것도 괘씸했지만, 사람 말을 이렇게까지 무시하는 건 좀 그랬다. 다행히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었다. 다가가 발톱을 되찾아 챙기는데, 등 뒤에서 석관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도 나는 이미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다.

돌문 앞에서는 한참 동안 애먼 벽만 살폈다. 무심코 발톱을 뒤집어 보니 안쪽에 문을 여는 순서가 새겨져 있었다. 열쇠에 비밀번호까지 친절하게 적어 놓은 셈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벽만 더듬고 있었다.

문 안쪽에는 미지의 글자가 빛나는 벽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모르는 언어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입 안에서 그 단어들을 몇 번 굴려 보았다. 뭔가 대단한 걸 배운 것 같기는 한데, 정작 쓰는 방법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사이 뒤에서 또 다른 시체가 일어났다. 사용법은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석판과 발톱을 단단히 챙겨 넣었다. 돈이 될 만한 칼과 투구도 제법 주웠다. 출구로 향하는 길, 몸이 둔해져 가방을 열어 보니 웬 접시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언제 챙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지만, 넣을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접시와 싸구려 투구를 바닥에 버리고 나니 그제야 다시 걸을 만했다.

산을 내려오며 칼과 활의 무게를 저울질해 보았다. 방패마저 팔아버리면 짐이 훨씬 가벼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방패는 남겨 두었다. 나는 원래 그쪽으로 시작한 사람이었으니까.

용도 잡았는데 이제 좀

리버우드에 발톱을 돌려주고 보상을 받았다. 화이트런에서는 석판을 건넸다. 계산이 딱 맞았다. 무덤 하나에서 두 가지 일을 끝냈고 주머니도 두둑해졌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면 될 것 같았다.

발길을 돌리려는데 용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영주는 서쪽 감시탑으로 병사들을 보내며 내게도 동행을 명했다. 용을 직접 본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저기, 그때 제가 한 일은 도망친 게 전부인데요.”

영주는 용이 어떻게 공격하는지는 알지 않느냐고 받아쳤다. 알기는 했다. 불을 뿜는다. 그래서 도망쳤다. 두 사실은 아주 밀접하게 붙어 있었는데, 입을 열수록 나를 데려가야 할 이유만 늘어나는 것 같았다. 결국 병사들과 함께 성문을 나섰다. 가까이서 본 경험이 이렇게 위험한 이력이 될 줄은 몰랐다.

감시탑은 이미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병사들이 앞으로 달려나갈 때 덩달아 뛸 뻔했다가, 벌어진 용의 입을 보고 우뚝 멈췄다. 정면에는 사람이 충분했다. 누군가 한 명쯤은 옆구리를 맡아야 했다.

나는 부서진 벽 뒤에 자리를 잡고 용이 땅에 내려올 때마다 틈을 노려 화살을 쐈다. 제대로 맞았는지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불길이 덮쳐와 얼른 다시 숨었다. 나는 잠깐만 보고 싶었는데 용은 불을 잠깐만 뿜는 법이 없었다.

용이 쓰러지고 나서도 한동안 벽 뒤에 웅크려 있었다. 병사들이 모여드는 걸 보고서야 슬며시 다가갔다.

그때 용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살이 타 없어지고 뼈가 드러났다. 그러더니 그 눈부신 빛이 내 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잠깐, 왜 이쪽으로 와.”

뒤로 물러났지만 소용없었다. 정체 모를 빛이 기어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서둘러 팔과 가슴을 더듬었다. 다행히 피부가 불타지는 않았다. 넋이 나간 병사 하나가 나를 ‘도바킨’이라고 불렀다. 용의 영혼을 흡수하는 자라고 했다.

무너진 감시탑과 병사들 앞에서 용의 해골로부터 빛을 받아들이는 전사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두 눈으로 봤다. 정작 내가 궁금한 건 그 이상한 기운이 몸 안에 들어와 있어도 건강에 지장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어서 소리를 질러 보라며 야단이었다. 진지하게 내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몸을 돌려 무덤에서 배운 단어를 외쳤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소리가 눈앞의 공기를 강하게 밀어냈다. 병사들이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얼얼한 목을 한 번 쓰다듬고 나자 다시 해 보라는 성화가 이어졌다. 나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방금 용을 때려잡고 영혼까지 삼킨 사람한테 이것저것 너무 부려 먹는 것 아닌가.

마을로 돌아가기 전 나는 바닥에 남은 용의 뼈를 챙겼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영혼만 달랑 챙겨 가기엔 몹시 아까웠다. 이렇게 거대한 용을 잡았는데 빈손으로 터덜터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뼈 몇 개를 가방에 쑤셔 넣자마자 눈에 띄게 걸음이 느려졌다. 하나쯤 버리고 갈까 망설이다가 이내 다시 우겨넣었다. 틀림없이 비싸게 팔릴 것이다. 정확한 시세는 몰라도, 싸구려 물건이 이렇게 육중하게 생겼을 리 없었다.

가벼운 차림의 병사들은 훌쩍 먼저 떠났다. 나는 무거운 발을 끌며 엉금엉금 걸었다. 그들이 영주에게 내 활약상을 어떻게 보고할지 상상했다. 곁에서 화살 몇 발 쏜 이야기 정도는 덧붙여 줘도 좋으련만. 그리고 제발, 내가 귀환하는 중이라는 말도 잊지 않고 전해 주길 바랐다. 어쨌든 가고는 있다고. 다만 아주 조금 오래 걸릴 뿐이라고.

성문에 다다랐을 때 산자락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바킨’이라는 외침이 들판을 쩌렁쩌렁 울렸다.

“네?”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내 바보 같은 대답을 들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영주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는 산 위에 있는 ‘그레이비어즈’가 부른 것이라며 찾아가 보라고 했다. 덤으로 내게 작위를 내리고 리디아라는 호위 무사까지 붙여 주었다.

리디아는 나와 내 재산을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무척 든든한 말이었다. 나는 감격해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며시 내 가방을 내려다봤다.

“혹시 짐도 좀 들어 줄 수 있어?”

그녀는 당연히 내 짐을 짊어지겠다며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화색을 띠며 가방을 열어젖혔다.

“용뼈인데.”

“보입니다.”

“이건 그냥 뼈가 아니야. 내가 처음 잡은 용이거든. 게다가 나중에 팔면 꽤 비싸게 받을 것 같고, 뭔가 장비를 만드는 데 쓸 수도 있고….”

내 핑계가 이어지는 동안 리디아는 묵묵히 가죽 끈을 풀어 짐을 넘겨받을 자리를 만들었다.

“몇 개입니까?”

나는 발앞에 쌓인 뼈를 내려다보았다. 가방 안에는 아직 더 남아 있었다.

“한 번에 다 꺼내서 좀 많아 보이는 걸 거야.”

그녀는 빈손을 내민 채 미동도 없이 기다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나머지도 마저 꺼냈다.

궁전 계단을 내려오는데 웬 남자가 다가와 구름 지구에 자주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럴 리 없지’라며 단정 지어 버렸다.

“방금 저기서 내려오는 길인데요.”

황당해서 궁전을 가리켰지만 남자는 이미 고개를 돌린 뒤였다. 쫓아가서 따지려던 찰나, 등 뒤에서 육중한 뼈들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리디아가 힘겹게 짐을 고쳐 메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향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돌아섰다.

성문을 빠져나와 깎아지른 산을 올려다봤다. 산꼭대기는 짙은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얘기만 듣고 올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약속이었다. 리디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믿어 주는 사람이 생겼다.

어차피 올라가는 길이라서

가까이서 마주한 산은 생각보다 옆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정상을 향해 걷고 있는데도 길은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지도와 산을 번갈아 보던 나는 결국 비탈을 곧장 기어올라 보기로 했다. 두어 걸음 오르면 여지없이 미끄러졌다. 이번엔 발을 옆으로 뉘어 디뎌 보았다. 그러자 몸만 옆으로 돌아간 채 똑같이 미끄러져 내렸다.

리디아가 저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길은 이쪽입니다.”

“알아. 그냥 올라갈 수 있나 확인해 본 거야.”

딱 한 번만 더 매달려 본 뒤에야 내려갔다. 바지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길을 찾는 데는 이처럼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리디아는 대답 없이 이미 걷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따라붙어 허공에 흩어진 설명을 마저 끝냈다.

이바스테드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계단을 찾았다. 무려 칠천 개의 계단이라고 했다. 그 아득한 숫자를 듣고 깎아지른 산을 다시 올려다보는데, 근처의 남자가 다가와 산 위에 식량을 좀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올라가는 길 아니냐면서.

도착지가 같다고 해서, 내가 산에 올라간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필요한 물건이 전부 내 짐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얼마나 무거운데요?”

아, 이걸 묻는 게 아니었는데. 거절할 사람이 짐 무게는 왜 물어.

남자는 꾸러미를 내밀었다. 나는 받아들고 리디아 쪽을 보았다. 리디아는 용뼈가 어깨를 파고들지 않도록 가방 끈 사이에 천을 덧대고 있었다. 나는 내 가방을 열었다.

“이건 내가 들게.”

계단을 세며 올라갔는데 중간에 늑대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숫자를 까먹었다. 다시 세지는 않았다. 어쨌든 꼭대기에 닿으면 칠천 계단을 다 올라온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먼 산 위의 수도원으로 이어진 눈 덮인 돌계단을 오르는 두 여행자

얼마 뒤 트롤이 뛰어내렸다.

놀라서 활부터 쐈다. 화살은 맞았는데 트롤은 계속 다가왔다. 한 발 더 맞혔지만 다가오는 속도는 그대로였다. 용은 가끔 하늘로 날아오르기라도 하지, 저놈은 한 번을 멈추지 않았다. 덩치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 잠깐. 잠깐만.”

뒷걸음질 치다 그만 계단 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리디아가 내 팔을 잡아끌어 일으키는 와중에도 나는 식량 꾸러미부터 껴안았다. 우리는 무작정 아래를 향해 달렸다. 내 활과 리디아의 묵직한 갑옷이 번갈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역시 계단은 내려갈 때가 훨씬 빠른 법이다. 방금 몇 계단이나 굴러 내려왔는지는 굳이 세어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숨죽이고 있다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트롤은 길 한쪽으로 비켜나 있었다. 내가 리디아에게 반대편을 가리키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전은 길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냥, 뛰는 거다.

달릴 때마다 짐 꾸러미 모서리가 턱 밑을 때려댔다. 등 뒤로는 육중한 갑옷 소리가 맹렬하게 따라붙었다. 수도원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온몸으로 버티자 리디아가 잽싸게 안으로 뛰어들었다. 간신히 문을 닫아걸고 나서도 우리는 한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봤지? 굳이 일일이 다 싸울 필요는 없다니까.”

리디아는 벽에 기대어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나 역시 그 옆에 널브러지듯 기대 섰다. 구차한 설명을 조금 더 덧붙일 참이었지만, 그러기엔 아직 숨이 너무 모자랐다.

잠잠해진 뒤 식량을 문밖 상자에 넣었다. 꾸러미가 처음보다 약간 납작해져 있었다. 내가 모서리를 펴고 매듭을 고쳐 매자 리디아도 반대쪽을 잡아 거들었다. 둘이서 매만지니 제법 처음과 비슷해 보였다. 뚜껑을 닫았다.

그레이비어즈 노인들은 내가 소리 지르는 걸 유심히 보더니 몇 가지 기술을 더 전수해 주었다. 몸을 앞으로 쏜살같이 날려 보내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마당의 육중한 문이 닫히기 전에 통과해 보라고 지시했다. 시키는 대로 하자, 몸이 말 그대로 바람처럼 튀어 나갔다.

나는 방금 지나온 문을 한 번 돌아본 뒤 억울한 얼굴로 선생님들을 쳐다보았다.

“혹시 이런 유용한 걸 산 아래에서 미리 가르쳐 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올라오는 길 중간에 서리 트롤이 한 마리 있거든요. 처음 오는 사람은 그런 게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수 있어서요. 물론 저도 전혀 몰랐고요.”

어색한 침묵 끝에 마지막 시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엔 무덤에 들어가 나팔을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잠깐, 또 무덤에서 뭘 가져와야 한다고?

마침내 도착한 무덤에서 리디아와 나는 어두운 물을 건너고 살벌한 함정들을 통과했다.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타날 때마다 내가 습관처럼 바닥에 웅크려 앉으니, 나중에는 리디아도 알아서 척척 몸을 낮췄다. 심지어 한 번은 그녀가 나보다 먼저 주저앉기도 했다. 나는 그녀 곁에 나란히 쪼그려 앉은 채 변명하듯 속삭였다.

“내가 원래는 칼하고 방패로 시작했거든.”

리디아의 시선은 이미 문 너머의 적들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저기, 허리에 아직 차고 다니는 거 보이지?”

그녀가 조용히 입술 위로 검지를 세웠다. 나는 군말 없이 입을 다물고 등 뒤에서 활을 꺼냈다.

안쪽까지 갔지만 나팔은 없었다. 먼저 가져간 사람이 리버우드 여관으로 오라는 쪽지를 남겨 놓았다. 나는 쪽지를 뒤집었다가 다시 봤다.

“리버우드라는데.”

“아시는 곳입니까?”

“잘 알지. 처음에 내가 밥 얻어먹은 곳이거든.”

질척이는 장화에서 흙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발끝을 들어 탁탁 털어내며 덧붙였다.

“그래도 길 헤맬 일은 없으니 다행이네.”

리디아는 내 옆에서 묵묵히 장화 안의 물을 빼고 있었다.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나도 굳이 좋은 점을 더 찾아내려 들진 않았다.

여기까지 했는데 이것까지만

나팔을 훔쳐 간 사람은 여관 주인 델핀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제가 무덤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는 확인하셨겠네요.”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다음에는 입구에 서 계시면 안 됩니까? 나오는 길에 확인하셔도 될 것 같은데.”

델핀은 보여 줄 것이 있다고 했다. 용의 무덤이었다. 나팔도 돌려받았으니 여기서 잠깐 쉬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용과 관련된 일이라니 듣고는 가야 할 것 같았다. 내 몸 안에도 용의 영혼이 하나 들어와 있지 않은가. 나 역시 당사자였다. 생각할수록 모른 척하기가 애매했다.

여관 밖에서는 리디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새로 가야 할 곳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듣던 그녀가 문 옆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나는 옆에 선 채로 이야기를 마저 하다가 결국 다른 의자를 끌어왔다. 막상 앉고 나니 당장 출발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리디아가 빵을 꺼내 반으로 나눴다. 나는 반쪽을 받아 들고 델핀이 한 말을 처음부터 다시 설명했다. 리디아는 묵묵히 빵을 씹으며 들었다.

나무로 지은 여관 앞에 나란히 앉아 빵을 나누어 먹는 갑옷 차림의 두 여행자

용의 무덤에 도착하니 헬겐에서 봤던 그 용이 죽은 용을 되살리고 있었다. 이름은 알두인이라고 했다. 용들의 두목인 것 같았다.

죽은 용들이 되살아나는 이유를 좇다 에스번이라는 노인과 오래된 벽화 앞까지 갔다. 알두인을 상대할 특별한 포효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걸 배우려면 그레이비어즈가 있던 산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가 봤는데.”

이번에는 더 위라고 했다.

“여기도 꽤 위였는데.”

어쨌든 다시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이제 길은 안다. 비탈길에다 대고 억지로 올라갈 수 있는지 비비며 시험하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됐다. 리디아가 산 쪽을 힐끗 보더니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냥 길로 갈 거야.”

나는 그녀가 묻지 않은 말에 대답했다.

갑옷과 배낭을 갖춘 두 여행자가 설산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는 모습

그레이비어즈의 스승은 파써낙스라고 했다. 그를 만나려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했다. 안기어는 눈보라를 걷어 내는 포효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리디아에게 안에서 쉬라고 일렀다.

“이번에는 진짜 얘기만 듣고 올게.”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믿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쉬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였다.

허공에 소리를 지르면 바람이 잠깐 멎고 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다시 눈보라가 앞을 막았다. 멈춰 서서 또 소리를 질렀다. 올라가는 내내 날씨와 실랑이를 해야 했다. 목이 쉬기 시작할 즈음 마침내 꼭대기에 다다랐다.

그리고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내 앞에 내려앉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활을 뽑아 들었다. 그런데 용이 말을 했다. 팽팽하게 당겼던 활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가 바로 파써낙스라고 했다. 나는 활을 등 뒤로 돌리고 파써낙스의 눈치를 살폈다. 활을 겨누던 걸 봤으려나. 아쉽게도 파충류의 표정을 읽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선생님이 용이실 줄은 몰라서요.”

어색한 변명에 파써낙스는 용들만의 인사법이 있다며 화제를 돌렸다. 그가 근처의 벽에 불을 뿜자 룬 문자가 환하게 빛났다. 벽 앞에 다가서자 낯선 언어가 머릿속에 그대로 각인되었다. 파써낙스는 방금 배운 인사를 자신에게 해 보라고 했다.

“얼굴 쪽으로요?”

파써낙스는 묵묵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제가 방금 배운 거라 힘 조절이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재촉 없이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눈 딱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불을 뿜어냈다. 뜨거운 불길이 파써낙스의 턱과 목줄기를 매섭게 훑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파써낙스는 흡족해했다. 나는 조심스레 입가를 닦으며 그를 훔쳐보았다. 다행히 비늘 하나 그을리지 않은 듯 멀쩡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스승을 뵈러 왔다가 스승을 바비큐로 구워버리면 스카이림 어디에서도 변명할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입 안에 맴도는 매캐한 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파써낙스는 용들이 목소리로 서로를 알아본다고 했다. 그렇기에 용들에게는 대화와 싸움이 다르지 않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면 제가 말씀 도중에 자꾸 질문을 던지는 것도 싸움을 거는 겁니까?”

“더 알고 싶은 것이 있는 게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 아까 배운 말도 그렇고, 용의 영혼이 제 몸에 흡수된 일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거든요.”

“무엇부터 알고 싶은가?”

나는 감시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어디가 아프진 않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파써낙스가 입을 열 즈음, 무덤에서 본 벽이 생각나 말을 덧붙였다. 그는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대화 내내 그는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기다려 주었다.

선 채로 설명을 듣다 보니 다리가 아파 와서 앉아도 되느냐고 물었다. 파써낙스는 내가 바위 곁에 털썩 자리를 잡을 때까지 말을 멈추었다. 무거운 가방을 벗어 내려놓고 나니, 궁금한 것을 얼마든지 더 물어봐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 덮인 산 정상에서 바위에 앉아 거대한 용을 마주하는 여행자

그의 입에서 용의 언어가 나오면 뜻을 물었고, 앞선 설명과 헷갈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산 아래였다면 누군가와 이토록 길게 이야기를 나눴을 때 대개 내 지도에 새로운 목적지가 여러 개 갱신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내가 먼저 묻고 싶은 것을 찾아내고 있었다.

알두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포효가 필요했다. 파써낙스는 그것을 직접 가르쳐 줄 수는 없다고 했다. 과거의 시간을 엿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엘더스크롤’이라는 고대의 두루마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방을 열었다. 말린 두루마리가 몇 개 들어 있었다. 하나를 꺼냈다가 끄트머리에 적힌 문구를 확인하고는 도로 쑤셔 넣었다. 불꽃을 일으키는 두루마리였다. 불을 뿜는 법은 방금 전 그에게 배웠으니 필요 없었다.

“그럼 그 두루마리는 어디에 있는데요?”

파써낙스도 위치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가방을 닫았다. 단서가 끊겨 조금 아쉬웠지만, 일단 무작정 가 보면 누가 알 것이라는 둥 무책임한 소리를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 두루마리를 어디에 써야 하고 왜 필요한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나는 남은 질문 몇 개를 마저 묻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로 내려오니 리디아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떤 분이셨습니까?”

“용이야.”

그녀의 손이 뚝 멎었다. 나 역시 산을 오르기 전 밑에서 그 사실을 미리 들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근데 괜찮은 분이야. 만나자마자 얼굴에 불을 좀 뿜긴 했는데, 되게 좋아하시더라고.”

리디아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리에 앉아 처음부터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두루마리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골치 아픈 이야기는 제일 마지막으로 미루었다.

아니 이번에는 안 해

두루마리를 찾아 헤매면서 지도는 입체적으로도 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설산을 내려와 바다에 닿기까지 했건만, 정작 가장 오래 걸은 곳은 빛나는 버섯이 군락을 이룬 지하 세계였다. 이 길이 바깥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해하면서도, 일단은 무사히 빠져나가기만을 바랐다.

푸르게 빛나는 거대한 버섯과 폐허가 있는 지하 세계를 걷는 두 여행자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가는 길, 내 품에는 금속으로 장식된 두루마리가 있었다. 이번 전리품은 내가 직접 챙겼다. 짐을 나눠 들려고 리디아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녀의 가방에서 생전 처음 보는 투구를 발견했다.

“이건 언제 주웠어?”

“아까요.”

“지금 쓰는 것보다 좋은 거야?”

리디아는 투구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직 안 써 봐서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챙긴 거야?”

“그냥 마음에 들어서요.”

나는 투구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용뼈를 계속 짊어지고 다닐 만한 핑계가 하나 더 생겼다. 우리는 짐을 고쳐 메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산 정상에서 두루마리를 펼치자 파써낙스가 말한 대로 까마득한 옛날의 환영이 눈앞을 스쳤다. 알두인을 추락시키는 포효를 깨우치는 순간, 마침내 진짜 알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갓 배운 지식을 까먹을 틈도 없었다. 나는 목청껏 포효했다.

포효는 적중했다. 세계를 삼킨다던 악룡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다음부터는 내게도 익숙한 솜씨를 발휘할 차례였다. 이빨이 늘어선 쪽을 재빠르게 피하며 활시위를 당겼다. 파써낙스도 함께 싸웠다. 두 마리의 거대한 용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온통 거대한 날개뿐이었다. 나는 애먼 동맹을 쏘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과녁을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첫인사 때 내 불길을 맞아주었다고 해서 날카로운 화살까지 너그럽게 넘어가 줄 리는 없었으니까.

치열한 싸움 끝에 알두인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산 위에는 파써낙스와 나만이 남겨졌다. 나는 내 몸이 무사한지 팔다리를 한 번씩 휘저어 확인하고는 흩어진 화살들을 주웠다. 이제 녀석이 어디로 튀었는지 쫓아야 했다. 또 귀찮은 과제가 늘었다는 불평은 속으로 삼켰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내게 ‘내일 할 일’ 따위는 영영 없어질 뻔했으니 말이다.

산을 내려가 델핀과 에스번을 만났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파써낙스가 한때 알두인의 오른팔로서 수많은 인간을 학살했다는 과거였다. 뒤늦게 알두인을 등졌다 한들 옛 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그들은 입을 모았다.

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듣기만 했다. 내가 겪은 찰나의 모습만으로 그들의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선고했다. 나는 으레 그렇듯 ‘해야 할 일’을 끄적이는 일지를 꺼내 그 위에 파써낙스의 이름을 묵묵히 적어 넣었다.

“산 꼭대기에 있는 그 파써낙스 말인가요?”

그렇다고 했다. 동명이룡도 아니고, 비슷한 다른 용도 아니었다. 내게 다짜고짜 얼굴에 불을 뿜어 보라 하고는 아주 잘했다며 칭찬해 준, 바로 그 용이었다.

나는 잠깐 준비해야 할 것들을 헤아려 보았다. 화살을 더 사야 했고, 회복약과 식량도 든든히 챙겨야 했다. 가방을 비운 뒤에는 다시 산을 오를 참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빤히 알았다. 이제는 길을 막는 눈보라도 걷어낼 수 있으니 헤맬 일도 없을 터였다.

다시 올라가면, 파써낙스는 내가 또 무언가 물어보러 온 줄 알겠지. 나는 늘 궁금한 게 많아 그가 대답하는 도중에도 불쑥 말을 끊고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면 그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앞선 대답과 엮어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도 그런 줄로만 알고 나를 기다려 줄 것이었다. 내가 활시위를 당기는 그 순간까지도.

“그 용은 죽이지 않겠습니다.”

델핀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무슨 일을 했는지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용한테 배웠고, 조금 전까지 같이 싸우고 왔습니다. 이제 가서 죽이라고 하시면…… 저는 못 합니다.”

델핀은 그 용을 처치하기 전까지는 더 이상의 조력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밖으로 나서자 리디아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품에서 낡은 일지를 꺼내 펼쳤다. 빼곡한 일정들 사이에 방금 적어 넣은 ‘파써낙스’의 이름이 위태롭게 끼어 있었다. 나는 그 이름 위에 한참 시선을 두었다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어디로 향할지 묻는 리디아에게 나는 짧게 대답했다.

“화이트런으로 가자. 배부터 채워야겠어.”

길을 걷는 내내 뱃속에 맴도는 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 늙은 용이 처음 어떻게 나를 맞이했는지, 내가 얼마나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캐물었는지, 엘더스크롤을 읽을 장소를 어떻게 가르쳐 주었는지. 내내 고개만 끄덕이던 리디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불을 뿜으며 인사하셨다는 건 아까도 들었습니다.”

“그랬나? 그럼 이건 말했던가? 바닥에 좀 앉아도 되냐고 내가 물었을 때….”

리디아는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수통을 열어 물을 들이켰고 이내 내게도 건네주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수통을 받아들었고 덕분에 쉴 새 없이 이어지던 회상도 그쯤에서 멎었다.

화이트런 장터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치즈를 한 덩이 사서 가방에 쑤셔 넣고 몇 걸음 내디뎠을까, 어깨가 짓눌리며 걸음이 턱 막혔다. 한숨을 쉬며 가방을 열어젖혔다. 커다란 용뼈 하나를 꺼내 들고 새로 산 치즈와 번갈아 노려보았다. 앞서 걷던 리디아가 돌아와 멈춰 섰다.

“조금만 기다려. 둘 중 하나만 어떻게든 처리하면 되니까.”

이 용뼈는 아주 값비싼 물건이다. 적어도 상인에게 넘기면 꽤 짭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저 치즈 역시 방금 내 피 같은 돈을 주고 산 식량이었다. 짧고도 치열한 고민 끝에 치즈를 크게 베어 물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한 입을 더 우물거려 부피를 줄이고 나서야 간신히 용뼈를 가방 틈새에 쑤셔 넣을 수 있었다.

눈이 남은 마을의 돌길을 갈색 가죽 배낭을 메고 앞서 걷는 리디아와 치즈를 먹으며 뒤따르는 뿔 달린 투구의 주인공 뒷모습

“리디아, 저 뼈다귀가 당장은 무겁고 쓸데없어 보여도 말이야….”

머쓱해진 내가 변명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묵묵히 손을 내밀었다. 나는 먹다 남은 치즈를 반으로 쪼개어 그녀의 손에 얹어 주었다. 리디아는 덤덤히 치즈를 받아 들고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나 역시 남은 치즈를 입안에 마저 털어 넣으며 부지런히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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