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이버펑크 2077》 본편과 확장팩 《팬텀 리버티》의 주요 장면과 결말을 다룹니다.
죽어서 술이 되는 곳
애프터라이프의 바 스툴에 앉아 짧은 단어 하나를 내뱉는다. 죽어 버린 어느 용병의 이름이다.
이 주점에서는 화려한 최후를 맞이한 자의 이름이 곧 한 잔의 칵테일이 된다. 목숨을 내던져 얻어낸 명성은 혀끝을 맴도는 알코올로 변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기꺼이 그 이름을 주문하며 망자를 추억한다.
생각에 잠긴 사이 바텐더 클레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술을 섞어 내민다. 차가운 글라스 표면에 맺힌 물방울 너머로 낡은 메뉴판 한편에 적힌 나이트 시티의 전설들이 조용히 어른거린다.
《사이버펑크 2077》의 나이트 시티는 장기부터 기억까지 모든 것에 가격표가 붙는 훌륭한 자본주의 도시다. 플레이어는 용병 V가 되어 이 삭막한 시장 바닥에서 의뢰를 챙기고 누구의 뒤통수를 칠지 고민하며 이름값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동네에서 가장 확실한 인지도 상승 비결은 건강한 장수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기가 막히게 요란한 타이밍에 죽어 버리는 것이다.
용병들의 핫플레이스인 ‘애프터라이프’는 원래 시체를 안치하던 영안실이었다. 지금은 한가락 하는 픽서와 덩치 큰 용병들이 술을 들이켜는 곳으로 업종을 바꿨지만, 내 이름을 딴 시그니처 칵테일을 남기려면 일단 숨통부터 끊어져야 한다. 꽤나 기상천외한 마케팅이다.
덕분에 이 술집에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인간들이 허공에 대고 죽은 자의 이름을 쩌렁쩌렁 외쳐대는 촌극이 매일 밤 벌어진다. 영안실을 개조한 장례식장치고는 시끄럽지만, 적어도 조의금 대신 술값은 확실히 뽑아내는 듯하다.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아 있었을 때
그때만 해도 재키 웰즈는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V와 함께 나이트 시티의 밑바닥을 박박 기어 다니면서도 그는 늘 도시의 펜트하우스를 올려다보며 네온사인에 자기 이름을 박아 넣겠다는 망상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애프터라이프 바에 처음 엉덩이를 붙인 날, 그는 전설로 죽는 게 최고의 은퇴 플랜이라는 듯 떠벌렸다. 그러고는 바텐더 클레어에게 자기 이름이 붙을 칵테일 레시피까지 미리 하사했다. 보드카 온 더 락, 라임 주스, 진저비어, 거기에 사랑 한 방울. 메이저리그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 주제에, 벌써 전설의 전당에 바칠 축배부터 말아둔 셈이다.
두 사람을 그럴싸한 용병들의 술집까지 데려온 건 아라사카의 칩을 훔치라는 한 의뢰였다. 최고급 호텔 콘페키 플라자에 잠입해 물건만 슬쩍 들고 나오라니, 참으로 간단명료한 자살 특공대 모집 공고가 아닐 수 없었다. 성공만 한다면 평생 구경도 못 할 돈과 명성이 굴러들어올 터였다.
재키는 드디어 인생의 동아줄이 내려왔다며 덥석 잡았지만, 두 사람은 나이트 시티의 뒤틀린 유머 감각을 과소평가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 튼튼하고 눈부신 동아줄은 하필이면 목에 딱 맞게 감기는 교수형 매듭으로 친절하게 묶여 있었다.
아라사카 호텔의 차가운 벽 뒤에서 권력을 쥔 아들이 아버지를 목 졸라 죽이고 독살로 위장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이 계획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칩을 보관하던 케이스가 망가지자 재키는 자신의 머리에 칩을 꽂았다.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델라메인 택시에 올라탔지만 출혈은 멎지 않았다. 재키는 칩을 꺼내 V에게 넘겼다.
조금 전까지 미래를 떠들던 동료는 이제 대답하지 않았다. 델라메인은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 물었다. 재키의 마지막 온기를 품은 칩만이 V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애프터라이프의 클레어는 보드카와 라임, 진저비어를 섞고 재키가 말한 ‘사랑 한 방울’을 더해 잔을 내밀었다. 재키 웰즈. 생전에 그토록 갈망하던 방식대로 그의 이름은 술이 되었다.
사람들은 메뉴판을 보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낡은 추억을 곱씹을 것이다. 그가 좋아하던 것은 그저 그렇게 남는다. 하지만 그 이름이 그가 살아 있었다면 보았을 미래까지 되돌려주지는 못한다.
시끄러운 바의 조명 아래 메뉴판에 영원히 묶여 버린 재키의 이름을 다시 바라본다. 그가 마지막으로 넘겼던 칩은 이제 V의 머릿속에서 남겨진 자의 내일을 소리 없이 파먹고 있다.
V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재키가 넘겨준 바이오칩 하나 때문에 V의 머릿속엔 수십 년 묵은 로커보이의 유령이 무단 침입했다. 아라사카가 무서워 벌벌 떨던 픽서가 V의 머리에 바람 구멍을 내고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을 때만 해도, 이 칩은 꽤 훌륭한 구급상자 같았다. 구멍 난 뇌를 기워 V를 예비 시체에서 현역 용병으로 돌려놓았으니까.
문제는 이 빌어먹을 구명 장치가 V를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렐릭은 새 입주자인 조니를 위해 V의 자아를 내쫓고 있다. 칩을 놔두면 V가 지워지고, 성급히 뽑으면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된다.
의사가 내린 시한부 선고는 길어야 몇 주. 총알에서 구해준 기계가 이제는 V의 목숨을 갉아먹는 타이머 노릇을 하고 있다.
덕분에 전설이 되겠다던 용병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가장 수지 안 맞는 의뢰에 매달리게 됐다. 설계자를 쫓고 기업 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방을 쑤시고 다닌다.
V는 그저 죽기 싫었을 뿐이다.
살아남아서 대단한 위인이 되거나 세상을 구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같은 건 없다. 기적처럼 살아난다고 해서 망가진 삶이 갑자기 특별해질 리도 없다.
모든 것은 그다음 문제다. 살고 싶다는 본능에 왜 굳이 이력서와 자소서가 필요한지 모를 일이다.

《팬텀 리버티》는 이 성가신 질문 앞에 V만큼이나 죽어가는 여자, 코드네임 ‘송버드’인 송소미를 데려다 놓는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V가 덥석 물 만큼 달콤한 사기극부터 던지고 본다. 도그타운에 추락한 전용기에서 대통령을 구해주면 V의 머릿속 렐릭을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살고 싶었던 또 한 사람
거짓말이 굴러가는 동안 송버드는 늘 통신 너머에 있었다. 그녀는 길도, 치료법도, 다음 수까지 미리 알고 있는 쪽이었다. 그러나 막상 탈출을 눈앞에 두었을 때 V는 자신을 살려주겠다던 송버드를 부축하고 있었다.
V의 어깨에 기댄 소미에게는 혼자 걸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우주공항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또다시 블랙월의 틈새를 억지로 열어젖힌 대가였다. 신 미합중국 대통령 마이어스의 오른팔이자 최정예 넷러너인 그녀는 통제 불능의 인공지능들이 떠도는 옛 네트워크의 방벽 너머에 접속할 때마다 정신과 신체가 바스러지고 있었다.
렐릭에 신경을 갉아먹히는 V. 국가의 도구로 쓰이다가 자기 몸에서 쫓겨나는 소미. 약속을 믿은 V는 둘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신경 매트릭스를 손에 넣고 그녀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셔틀로 향하는 열차의 차가운 금속 의자에 그녀를 뉘였을 때,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뒤늦은 고백이 흘러나왔다. 둘을 모두 살릴 수 있다던 장치가 사실은 단 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는 것. 셔틀 탑승구를 눈앞에 두고 그녀는 스스로 생존의 끈을 V에게 넘겨주었다.

그 고백을 들었을 때 내게는 배신감보다 기묘한 연민이 먼저 차올랐다.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면 그녀는 V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달로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소미는 제 목숨을 담보로 거짓말을 털어놓았다. 살아남기 위해 나를 속였던 사람이 이제는 내가 자신을 버릴 수도 있는 이유를 직접 말하고 있었다.
그 선택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벌어진 죽음들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 V는 살 수 있다는 희망에 기대어 이 진흙탕 같은 일을 강행했고, 셔틀 앞에는 리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미를 정부에 넘기면 V를 치료해주겠다는 제안. 리드는 그것만이 망가진 부하를 살릴 방법이라고 믿었다. 소미에게는 다시 블랙월의 도구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V에게는 목숨을 건질 마지막 기회였다.
V는 총을 겨눈 채 한동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리드도 물러서지 않았다. 끝내 총성이 울린 뒤에야 길이 열렸다.
나는 속았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벌어진 희생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부서질 듯 작아진 이 여자가 저 셔틀에 올라 기어코 달에 닿기를 바랐다.
셔틀의 육중한 문이 닫혔다. V는 엔진의 굉음과 함께 기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그녀를 붙들던 두 손이 갈 곳을 잃었다. 멀어지는 불꽃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렐릭은 여전히 V의 신경을 파먹고 있었다.

다시 술잔 앞에서
차가운 유리잔 안에서 보드카와 라임, 진저비어가 차례로 섞인다. 마지막으로 사랑 한 방울이 떨어지면 잔을 들어 재키의 이름을 부른다. 텅 빈 자리를 향해 함께 거리를 누비던 이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는 서글프지만 분명한 위안이 있다.
기억 속에서 그는 늘 크롬빛이 가득한 메이저리그를 꿈꿨다. 인생을 뒤바꿀 거대한 의뢰를 앞두고 잔뜩 상기되어, 이번 한탕만 끝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며 자기 이름이 붙은 술을 상상하던 얼굴.
계속 그 꿈을 좇았을지, 아니면 전혀 다른 삶을 갈망하게 되었을지, 멈춰 버린 시간 너머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남겨진 자들은 그가 남긴 낡은 농담과 유언 같은 말들을 수없이 되풀이할 뿐이다.
애프터라이프의 바 테이블 위, 그의 이름이 붙은 술잔 겉면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린다. 정작 이 잔의 주인은 영원히 이 자리에 앉지 못할 터였다.
만약 그가 살아서 저 차가운 잔을 쥐었더라면,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오늘은 또 무슨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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