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가 끝나지 않는 정원 — 엘든 링

황금 나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끝맺지 못한 죽음이 누워 있었다.

황금빛 거목과 안개에 잠긴 폐허를 바라보며 언덕에 서 있는 갑옷 입은 인물
The Warmth That Remains Nap Lee / made with Suno
0:00

※ 이 글은 《엘든 링》 본편의 핵심 설정과 피아 퀘스트, 관련 엔딩을 다룹니다.

돌아갈 방

축복 앞에 앉아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다 펴고 나서도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쥐고 있는 듯했다. 빛줄기는 다음에 갈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때 우리가 잃었던 축복. 황금의 축복을 잃고 틈새의 땅 밖으로 밀려난 우리를 사람들은 빛바랜 자라 불렀다. 오랫동안 등을 돌렸던 빛이 다시금 나타나자, 나는 그 빛을 따라 틈새의 땅으로 돌아왔다.

황금 나무가 보였다. 먼 산맥보다 높이 뻗은 가지와 하늘 한쪽을 가득 채운 황금색 잎들. 그 아래로 무너진 건물과 성벽까지도 무척 아름다웠다. 언덕을 내려가 길가에 버려진 시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질서를 이루던 엘든 링이 부서졌다고 했다. 파편을 차지한 여신 마리카의 자식들은 이 땅의 패권을 두고 파쇄전쟁을 벌였지만 끝내 누구도 왕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각자의 성에 남았고, 성 아래의 땅은 폐허가 되었다. 축복은 나더러 그 땅을 지나 엘든 링 앞에 서라고 했다. 왕이 되라고.

정작 나는 병사들이 지키는 길목 하나를 지나기도 벅찼다. 몸을 낮춰 걷다가 폐허 안에서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 일단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밤이 오면 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아 허물어진 벽에 등을 붙이고 쉬었다. 그래도 바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밤이면 왕이 된 내 모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멜리나를 만나 원탁으로 인도받은 것은 고단한 밤들이 한참 쌓인 뒤였다. 왕을 꿈꾸는 빛바랜 자들이 모이는 곳이라 했다. 방과 복도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일을 하고 있었고, 어디선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도 마음을 놓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지붕이 있었고, 당장 내게 달려드는 것은 없었다.

대장장이를 지나 안쪽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침상에 앉아 있던 검은 옷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피아라고 소개한 뒤, 잠시 나를 안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무언가를 찾아오라거나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말이 뒤따를 줄 알고 잠시 대답을 미뤘다. 피아는 내 생명의 기운과 온기를 조금 나누어 달라며, 그 대신 내게는 ‘휘장의 은총’이 깃들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들 가운데서 잠시 몸을 기댈 수 있다는 뜻을 먼저 들었다.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굽히자 피아가 팔을 벌렸다. 얼마나 몸을 맡겨도 될지 몰라 어깨는 한동안 굳어 있었다. 등을 감싼 팔 안에서 조금씩 힘을 뺐다. 방 밖에서는 여전히 망치 소리가 났다.

따뜻하다고, 피아가 말했다.

먼 길과 몇 번의 싸움을 겨우 지나온 몸이었다. 이렇게 지친 내 몸에서도 누군가는 온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촛불이 켜진 방에서 검은 옷의 여인이 무릎 꿇은 갑옷 입은 인물을 안고 있다

피아는 자신이 고향에서 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영웅들에게 받은 생명의 온기와 기력을 모아 신분 높은 망자의 곁에 눕고, 그렇게 모은 생명으로 죽은 이에게 또 한 번의 삶을 주는 것이 ‘동침의 처녀’로서의 목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축복의 인도를 받았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동침의 처녀이고 싶어 했다.

피아에게는 신성한 의식이었지만, 시체 곁에 누워 새로운 삶을 잉태한다는 말은 내게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래도 모든 걸 이해해야만 이 품에 머물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을 나서며 다시 무기를 들었다. 피아는 필요하면 돌아오라고, 얼마든지 안아주겠다고 했다. 다음에 돌아와도 이 방은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죽음을 사냥하는 사람

D는 길가의 시신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당신의 영혼이 황금 나무로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금과 은이 맞붙은 기묘한 갑옷을 입은 그는 내가 다가간 뒤에도 잠시 죽은 이를 향해 말을 이었다.

자신을 죽음을 사냥하는 자라고 소개한 그는 근처의 ‘죽음에 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경고를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에 잠긴 폐허에서 뼈들이 일어났다. 살이 없는 손으로 무기를 끌듯 걸어왔고, 칼에 쓰러진 뒤에도 흩어진 뼛조각 사이로 다시 빛이 모였다. 완전히 일어서기 전에 한 번 더 내려쳐야 했다.

D는 그들을 사냥하며 사근을 거두었다. 사근은 죽음을 퍼뜨려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뿌리였다. 그에게 배운 ‘죽음을 바로잡는 성률’은 황금률의 형상을 불러내 잘못된 죽음을 불태우는 기도라고 했다. 그 기도로 쓰러뜨린 뼈들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D에게 ‘죽음에 사는 자들’은 존재 자체로 이 땅의 질서인 황금률에 어긋났다. 허락되지 않은 죽음이라면 바로잡아야 했고, 그에게 바로잡는다는 것은 결국 없애는 일이었다. 다른 답은 없어 보였다.

원탁에 돌아올 때면 그 방에 들렀다. 무기를 내려놓고 몸을 맡기는 일이 조금씩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피아가 낡은 ‘삼켜진 단검’을 건넸다. 주인을 찾아 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D는 단검을 보더니 주인을 안다며 대신 전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맡겼다.

다음에 원탁으로 돌아왔을 때, 대장장이 너머의 다른 방이 열려 있었다.

D가 방 안에 쓰러져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갑옷 차림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가 시신 앞에 서 있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피아가 있었다.

D가 쓰러진 자리에서, 피아는 고귀한 이에게서 빼앗겼던 죽음의 흔적이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했다. 원탁에 전해달라는 말도 남겼다. 고드윈의 죽음을 방해하지 말라고. 죽음에 사는 이들이 자신들의 왕을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피아가 D를 죽이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내 손을 거친 단검도, 그 품에서 풀렸던 어깨도 자꾸만 떠올랐다. 어느 기억도 다른 기억을 지우지 못했다.

피아가 사라진 뒤에도 원탁의 망치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날 때면 한 번씩 그녀의 방 쪽을 보았다. 다시 들어가지는 않았다.

갈라진 죽음

피아가 남긴 이름, 고드윈에 관해 더 알고 싶어 원탁의 마술사 로지에르를 찾아갔다. 죽음의 흔적을 조사하던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스톰빌 성 지하에서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성 밑바닥에서 뿌리와 뒤엉켜 있던 얼굴은 거대했다. 짐승의 사체 같기도 했고, 무언가가 사람의 얼굴을 흉내 낸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얼굴에 관해 로지에르에게 물었다.

로지에르는 그 얼굴에서 오래전의 죽음을 짚었다. 엘든 링이 부서지기 전, ‘검은 칼날의 음모’가 벌어진 밤이었다. 죽지 않을 것 같던 신의 혈육들 가운데 황금의 고드윈이 처음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를 죽인 자객들의 칼에는 죽음의 룬, 곧 ‘운명의 죽음’의 힘이 새겨져 있었다. 황금률이 세워질 때 엘든 링에서 떼어내 봉인한 힘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로지에르의 조사를 도왔다. 자객들이 쓴 칼날을 조사하던 중 마녀 라니의 이름이 나왔다.

라니는 인형의 몸으로 나를 맞았다. 죽음의 룬 조각을 훔치고, 의식을 통해 신을 죽일 검은 칼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라니는 내가 찾는 죽음의 흔적이 지금의 인형 몸에는 없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버렸으며, 그 흔적은 버린 몸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훗날 라니의 일을 돕다가 그 육신이 있는 신수탑에 이르렀다. 탑 꼭대기에는 불에 탄 몸이 남아 있었다. 그 몸에 새겨진 반원 모양의 흔적이 ‘죽음의 주흔’이었다.

주흔을 얻고서야 그날 밤의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데미갓 최초의 죽음에는 하나의 온전한 원이 새겨졌어야 했다. 그러나 라니와 고드윈이 같은 순간 서로 다른 절반의 죽음을 맞으면서, 주흔도 둘에게 반쪽씩 남았다.

라니에게 남은 것은 영혼이었다. 그래서 육신을 잃고도 인형의 몸으로 나와 이야기할 수 있었다. 반면 영혼을 잃은 고드윈에게는 완전히 죽지 못한 육신만이 남았다.

밝고 어두운 찢어진 종이 위에 서로 마주 놓인 두 개의 반원

고드윈은 도읍 아래, 황금 나무의 깊은 뿌리에 묻혔다. 영웅의 유해를 황금 나무로 돌려보내는 장례였다. 그러나 그의 몸에 남은 죽음은 뿌리를 타고 퍼져나갔다. 그 끝에서 사근이 돋았고, 묘지의 뼈들이 다시 일어났다.

로지에르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D가 사냥하던 ‘죽음에 사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주흔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규율의 결함에 닿아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 했다.

내게 달려드는 이들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태어난 일까지 그들의 죄가 될 수 있을까.

문득 축복을 잃고 이 땅에서 밀려났던 우리도 떠올랐다. 다시 빛이 보였을 때는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정작 우리가 왜 이곳에 머물 수 없었는지는 그전까지 묻지 않았다.

축복이 없던 동안에는, 우리에게 이 땅에 머물 자격도 없었던 것일까.

끝나지 않은 장례

여정 중 도읍 외곽의 묘지에서 작은 직검 하나를 얻었다. 최초로 죽은 데미갓 고드윈을 기리는 ‘황금 묘비’였다. 검에는 어린 소년의 기도가 깃들어 있었다.

“형님, 형님, 올바르게 죽어주세요.”

소년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죽어달라는 부탁 앞에 ‘형님’이 두 번이나 붙어 있었다. 원망이라면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이미 죽은 이를 기리는 검에, 그 죽음이 제대로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지하의 무너진 도시와 수도교를 지나 깊은 뿌리에 닿았을 때, 전승으로만 듣던 고드윈의 몸이 눈앞에 있었다. 비늘에 가까운 살갗을 한 육신은 뿌리에 뒤엉켜 있었고, 어디가 얼굴이고 어디까지가 몸인지조차 쉽게 알아보기 어려웠다.

거대한 뿌리에 뒤엉킨 얼굴과 비늘 같은 육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인물

스톰빌 성 아래에서 그 얼굴을 보았을 때는 성의 지하가 오염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땅 전체가 한 구의 시체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한때 황금이라 불렸다는 왕자를 눈앞의 형상과 겹쳐 보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그가 어떤 목소리로 말했는지, 누구와 웃고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누군가는 그를 형이라 부르며 이 죽음이 제대로 끝나기를 빌었다.

칼자루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무엇을 해야 이 장례가 끝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다, 안기고 싶다

왕자의 몸으로 다가가자 피아를 지키는 영웅들의 영체가 앞을 막았다. 그들을 쓰러뜨리고서야 다시 피아와 마주했다. 피아는 곧장 나를 안아주지 않았다. 무엇을 하러 왔느냐고, 황금률의 완고한 이들처럼 자신들과 그 방식을 부정하러 온 것이냐고 물었다.

D의 갑옷이 떠올랐다. 피아 뒤로는 고드윈의 거대한 몸이 놓여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렸다.

“아니다, 안기고 싶다.”

피아는 자신이 죽음에 사는 자들의 수호자이며, 더럽고 썩은 마녀라 불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향하는 미움과 증오도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했다. 그래도 정말 이 품에 들어오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등을 감싼 팔은 원탁에서와 같았다. 눈을 감아도 D의 죽음과 방금 쓰러뜨린 영체들, 우리 뒤에 놓여 있는 고드윈의 몸이 떠올랐다. 이 품 안에 그들까지 함께 들어와 있는 듯했다. 나는 피아가 왜 이 몸 곁에 남아 있는지 듣고 싶었다.

피아는 고드윈을 ‘죽음의 왕자’라 불렀다. D의 죽음 뒤 그녀가 되찾았다고 말한 것은 고드윈의 몸에 새겨졌던 반쪽의 주흔이었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왕을 맞으려면 같은 모양의 주흔을 하나 더 찾아야 한다고 했다.

라니의 버려진 육신에서 가져온 주흔을 꺼내자 피아는 곧 알아보았다. 이제 고드윈에게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녀가 말한 새 생명은 ‘죽음에 사는 자들의 룬’으로, 둘로 갈라졌던 죽음의 흔적이 하나로 이어져 태어날 것이었다. 피아는 고드윈 곁에 누워 그 룬을 잉태하려 했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아이라고 불렀다.

손 안의 주흔을 내려다보았다. D에게 단검을 맡겼던 일이 떠올라 선뜻 피아에게 내밀지 못했다. 그에게 벌어진 일을 옳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죽음에 사는 자들이 더는 사냥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내게 이 땅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이 있었듯, 그들에게도 이 땅에 머물 자리가 필요했다.

나는 주흔을 피아의 손에 건넸다.

피아는 내게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이 낳을 룬으로 엘든 링을 수복해 죽음에 사는 자들이 박해받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다.

처음 황금 나무를 올려다보았을 때에는 왕이라는 자리도 그만큼 멀리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안아주던 사람이 눈앞에 앉아 내가 왕이 된 뒤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

피아는 만족한다고 했다. 남이 정해준 유해 곁에 눕는 대신, 자신의 뜻으로 고드윈 곁에 눕는 것이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 아이가 내 온기도 이어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탁의 작은 방에서 지친 몸을 잠깐 기댔을 때만 해도, 건넨 온기가 여기까지 닿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원탁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다시 그 방에 앉아 있어 달라고. 피아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내가 돌아갈 방 하나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피아는 이미 작별을 말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잠든 뒤에도 한동안 곁에 머물렀다. 잠든 몸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달라졌다. 나는 동침의 꿈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위로 세찬 벼락이 떨어지고 붉은 번개가 땅을 갈랐다. 번개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죽음의 안개가 남았다. 빈틈이 보일 때마다 베고 물러났다. 피아 곁에서 하던 생각을 이어갈 여유는 없었다.

붉은 번개가 번지는 폐허에서 거대한 검은 용을 마주한 검 든 인물

용을 쓰러뜨린 뒤 그가 남긴 ‘추억’을 얻었다. 그제야 방금까지 싸우던 상대의 이름과 사연을 알게 되었다.

포르삭스. 고드윈의 벗이었던 고룡이었다.

고드윈이 죽음의 왕자가 된 뒤에도 그는 벗 안에 깃든 죽음과 싸웠다. 그러나 오랜 싸움에도 죽음을 몰아내지 못했고, 끝내 자신까지 잠식되어 사룡이 되었다.

황금 묘비에 기도를 남긴 소년은 왕자가 올바르게 죽기를 빌었다. 포르삭스는 왕자 안에 남은 죽음과 끝까지 싸웠다. 어떤 마음으로 그토록 오래 버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 저항이 고드윈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을까.

포르삭스는 더 이상 벼락을 부르지 않았다.

나는 피아에게 돌아갔다.

꿈에서 돌아온 뒤

고드윈 곁에 누운 피아는 가까이 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원탁에서 여러 번 들었던 인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는 ‘죽음의 왕자의 수복 룬’이 남아 있었다. 둘로 갈라졌던 죽음의 주흔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피아가 아이라고 부르며 내 온기도 이어받을 것이라 했던 룬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왕이 되어 이 룬으로 부서진 엘든 링을 수복한다면, 황금률 아래에서 사냥당하던 이들도 이 땅에 머물 수 있도록 세계의 규율을 고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룬 하나를 손에 넣었다고 눈앞의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머리 위로는 여전히 고드윈의 거대한 몸이 뿌리와 뒤엉켜 있었다. 그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힘으로 사근의 위험까지 모두 사라질지, 지상에서 칼을 들고 달려들던 죽은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왕이 아니었다.

그래도 엘든 링 앞에 선다면 이 룬을 쓰기로 했다. 처음으로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다시 피아를 보았다. 돌아오면 얼마든지 안아주겠다던 말은 이제 다시 듣지 못할 것 같았다.

큰 뿌리 아래 누운 검은 옷의 여인 곁에 앉아 손을 잡고 있는 갑옷 입은 인물

피아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손가락에 다시 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듯이. 돌아가면 안 되겠느냐는 말 대신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룬을 챙긴 뒤에도 무기는 바닥에 두고 곁에 앉아 있었다. 일어설 때가 되어서야 잡고 있던 손을 피아의 품 안에 놓았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검은 천을 조금 끌어올리고, 다시 미끄러지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제야 바닥에 놓아둔 칼을 집어 들었다.


댓글0

의견이 다른 댓글도 환영합니다. 다만 광고, 도배, 혐오·위협 표현, 타인의 개인정보가 포함된 댓글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 표시가 있는 항목은 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