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 3 — 기록자와 살인자

그는 내가 달라져 온 날들과, 내가 죽인 사람의 이름을 함께 기록할 것이다.

불빛과 달빛이 비치는 석조 공간에서 마주 선 위더스와 투구 쓴 인물
이 글의 음악 Embers and Memory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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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발더스 게이트 3》 ‘어두운 충동(Dark Urge)’의 주요 서사와 결말을 다룹니다. 일부 대화는 서술의 흐름에 맞게 재구성했습니다.

“필멸자 하나의 삶에는 어떤 가치가 있느냐?”

석관에서 일어난 위더스는 내게 대뜸 그렇게 물었다. 내가 누구였는지도 모르던 나는 그저 이상한 질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위더스는 우리 야영지에 자리를 잡았다.

열린 석관을 사이에 두고 손을 펼친 위더스와 남색 망토를 두른 인물

비행선 노틸로이드에서 눈을 뜨기 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의 손을 볼 때면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내는 모습이 떠올랐고, 누군가 내 앞에 서기만 해도 그를 죽이는 상상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런 생각이 왜 자꾸 떠오르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충동을 거부하며 길을 나섰다. 머릿속에 무엇이 떠오르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멈출 수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붉은 유기체 형태의 통로에서 벽을 짚고 푸른 출구를 바라보는 투구 쓴 인물

노래를 만들던 사람

드루이드 숲에서 만난 알피라는 죽은 스승을 위한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동족들과 함께 발더스 게이트로 향하던 티플링 음유시인이었다. 길에서 놀의 습격을 받았을 때 알피라는 살아남았지만 스승 리할라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가 만들던 곡 「The Weeping Dawn」은 좀처럼 완성되지 않았다.

밝은 하늘과 바위 계곡을 배경으로 나무 아래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알피라

나는 리할라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알피라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알피라가 언젠가 발더스 게이트의 엘프송 주점에서 스승을 위해 노래하고 싶어 했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알피라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에게는 잃은 사람이 있었고,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알피라가 야영지를 찾아왔다. 함께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받아들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알피라는 죽어 있었다.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시신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잠든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동료들에게 내가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여행하겠다며 찾아온 사람은 그날 밤 내 손에 죽었다. 그 뒤로는 알피라가 하려던 일보다 내가 저지른 일이 먼저 떠올랐다.

밤이 지날 때까지

얼마 뒤 스켈레리타스 펠이라는 기묘한 집사가 찾아왔다. 그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며 알피라를 죽인 일을 축하했다. 그가 나를 아는 듯했기에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물었다. 하지만 집사는 내 과거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림자 저주가 내린 땅에서는 불빛 없이는 돌아다니는 것조차 위험했다. 최후의 빛 여관에 모인 사람들은 이소벨이 지키는 방벽 안에서 저주를 피하고 있었다. 이소벨이 죽으면 그들을 지키던 방벽도 무너질 터였다. 집사는 이소벨을 죽이라고 했다. 나는 거부했다.

얼마 뒤 집사가 다시 찾아왔다. 이소벨을 죽이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잠이 들면 내 손으로 섀도하트를 죽이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섀도하트를 깨워, 내가 잠들면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달아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을 묶어두고 내가 몸부림치는 동안 곁을 지켰다.

밤이 지나도 섀도하트는 살아 있었다.

모닥불 곁에서 손목이 묶인 투구 쓴 인물과 그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섀도하트

남겨진 글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발더스 게이트가 가까워질수록 내가 잊어버린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달오름 탑 지하에서 만난 크레사도 나를 알아봤다. 오린에게 머리를 찔려 거의 죽어가던 나를 발견해 살려 놓았다고 했다. 그 뒤로는 내 몸을 거듭 열어 보며 내 머릿속의 기생충을 연구했다.

연구 일지에는 내가 ‘첫 번째’ 실험체로 적혀 있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와 머릿속의 기생충은 물론, 장기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은 일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발더스 게이트에서 만난 고타쉬는 나를 옛 공범처럼 대했다. 그가 기억하기로, 살인의 신 바알의 선택받은 자는 오린이 아니라 나였다. 내가 사라진 뒤 오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다.

고타쉬는 카서스의 왕관을 훔치는 일도 나와 함께 꾸몄다고 했다. 그 왕관으로 엘더 브레인을 지배해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고타쉬의 말을 듣자 달오름 탑 지하에서 읽었던 기도문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고타쉬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 기도문은 내가 바알에게 바친 글이었다. 고타쉬와 세운 계획으로 힘을 손에 넣은 뒤 세상의 모든 생명을 없애겠다고 적었다. 때가 오면 함께 일을 꾸민 자들까지 죽이고, 마지막에는 나 자신도 죽이겠다고 했다.

“모두 죽을 것이다. 모두 당신을 위해 죽을 것이다. 당신의 자랑이 되겠다.”

알피라가 죽은 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이 기도문을 쓴 나는 누구를 죽일지, 마지막에 무엇을 남길지까지 정해 두고 있었다. 그 말들이 무슨 뜻인지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런 일을 원했던 마음만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쓴 말을 내가 읽고 있었다.

촛불이 켜진 책상에 손을 짚고 펼쳐진 종이를 내려다보는 투구 쓴 인물

돌아갈 자리

내 머리를 찌르고 죽도록 내버려 둔 오린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복수가 될 수 있었다. 빼앗긴 자리를 되찾는다면, 잃어버린 과거까지 되찾은 듯 느껴질지도 몰랐다. 스켈레리타스도 아마 그런 결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린의 어머니 헬레나도 한때 그 자리를 원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사레복의 명령을 받아 어린 딸을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딸의 손에 죽고 말았다. 죽은 자와 대화하는 주문으로 헬레나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오린 모두 사레복을 사랑했다고 했다.

사레복이 헬레나에게 내렸던 명령을 생각하자 잠들면 내 손으로 섀도하트를 죽이게 될 거라던 집사의 말이 떠올랐다.

오린이 그토록 원했던 자리가 어떤 자리였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바알의 신전에서 오린은 일대일 결투를 요구했다. 살아남은 쪽이 바알의 선택받은 자가 되는 싸움이었다. 결투가 끝났을 때 살아남은 것은 나였다.

바알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다시 살인자가 되었다고 여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선택받은 자가 되어 엘더 브레인을 지배하고 세상의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했다.

붉게 빛나는 제단 앞에서 두 팔을 내리고 고개를 숙인 투구 쓴 인물

기도문에 적어 둔 약속을 지키려면 아직 죽여야 할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내 곁을 지켰던 섀도하트도, 나와 함께 여기까지 온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약속을 저버리고 바알을 거부했다.

그러자 바알은 내 안에 심어 둔 것을 거둬 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기록자의 옹호

위더스가 나타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촛불이 비치는 돌바닥에 앉은 투구 쓴 인물과 곁에 서 있는 위더스

위더스는 자신을 서기이자 집사, 기록을 지키는 자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자들의 도시에 가서도 내 편에 서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그러하다.”

“내가 누구인지도?”

“그대가 무엇을 했는지도.”

과거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내게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줄곧 야영지에 있었다.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진실을 말하는 것 또한 간섭이니라. 필멸자의 마음은 쉽게 흔들리는 법이지.”

위더스는 내가 다시 살아난 까닭도 설명했다. 바알은 자신이 내게 심어 둔 것만 거두어 갔을 뿐이었다. 기억을 잃은 뒤 살아오며 달라진 나까지는 가져갈 수 없었다.

노틸로이드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누구였고 무엇을 거부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바알이 차지하라고 했던 엘더 브레인을 파괴했다. 엘더 브레인이 카서스의 왕관의 힘으로 네더브레인이 된 뒤였다.

나는 다시 살아났지만 알피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위더스가 내 편에 서겠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게는 그 뒤로 어떻게 살아왔는지까지 함께 기록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알피라의 이름도 그 기록 안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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