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ONAL JOURNAL
BY NAP LEE
Nap Lee.An archive of notes and tastes
WORDS, WORK
& THINGS IN BETWEEN

하고 싶은 마음에도 결재가 필요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반려 사유가 먼저 도착한다. 그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

No Approval Needed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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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차올라도 나는 좀처럼 곧장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모든 일은 내면의 까다로운 접수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마치 머릿속에 작은 회사라도 하나 차려둔 것 같다. 기안자와 검토자, 최종 결재권자까지 모두 나 한 명뿐인 참으로 부지런한 조직이다.

밤늦게 꽤 괜찮은 글감이 떠올랐을 때도 그렇다. 몇 문장이라도 바로 기록해 두면 좋으련만 내 안에서는 어김없이 검토 회의가 소집된다.

  • 어디서 본 듯한 소재는 아닌가?
  • 내가 이미 쓴 이야기와 겹치지는 않는가?
  • 내일이면 시시해질 내용인가?
  •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반대로 너무 보편적인 이야기는 아닌가?
  • 무엇보다,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인가?

글은 아직 단 한 줄도 쓰지 않았지만 기획을 반려할 그럴듯한 사유는 벌써 다섯 개나 도출되었다.

결국 그날 밤 내가 완성한 것은 한 편의 글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반려하기 위한 한 장의 사유서였다.

감정 발생 경위서를 제출할 것

이 절차에 오르는 것은 생각만이 아니다. 감정에도 비슷한 규정이 적용된다.

이유 없이 마음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날이면 나는 기어코 이 감정의 진원지를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일에 치여서인지,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했던 탓인지, 그저 잠이 모자랐던 것인지, 아니면 삶의 방향성마저 잃어버린 것인지 하나하나 따져 묻는다.

정작 몸이 원하는 건 짧은 단잠이 전부인데, 내부 감사팀은 계속해서 현 상황에 대한 소명서를 요구하는 셈이다.

즐거울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정말 좋아서 기쁜 것인지, 새로움에 잠시 들뜬 것인지, 현실을 피할 구실을 찾아 신이 난 것인지 기어이 확인하려 든다.

기쁨은 진위 판정을 기다리다 식어버리고, 슬픔은 발생 원인을 해명하느라 어느새 흩어진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까?”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마음은 대체로 이런 질문에 약하다. 대부분의 감정은 조금 모호하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오늘과 내일의 진술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안의 심사위원회는 기어이 일관된 답변을 요구한다. 위원회는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삼는다.

그런데 그 한 명이 늘 반대한다.

진심의 자격 요건

돌이켜보면 내 안의 심사위원회가 요구한 것은 납득할 만한 이유만이 아니었다. 위원회는 그 마음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보증까지 원했다.

글을 한 편이라도 써보고 싶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쓸 생각인지 답해야 했다. 문득 취미를 시작하고 싶어지면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지부터 밝혀야 했다. 새로운 공부에 흥미가 생기면 그것이 훗날 어떤 쓸모가 있을지 설명해야 했다.

오늘의 호기심에 미래의 나를 연대보증인으로 세운 셈이다.

나는 오래 지속되는 마음만을 진심이라 여겼다. 며칠 만에 흥미를 잃으면 역시 충동에 불과했다고 판단했고, 시작한 일을 끝까지 붙들지 못하면 처음의 열망마저 과장된 것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나는 허가부터 구했다. 행동 하나를 선택하는 일과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정하는 일을 자꾸 같은 결재함에 넣어두었다.

일을 시작하기 위한 일을 시작하다

콘셉트 아트를 준비하던 시절에는 이런 일이 흔했다. 무언가를 그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우선 레퍼런스를 모으고 무엇을 그릴지 텍스트로 구체화했다. 레퍼런스 폴더와 설정 문서는 제법 충실해졌지만 정작 캔버스에 남은 것은 빈약한 스케치뿐이었다.

물론 그것을 스케치라고 불러도 될지는 별도의 심사가 필요했다. 비록 작업은 첫 단계에서 멈췄지만,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체계만큼은 거의 완벽했다.

나는 이런 상태를 오랫동안 게으름이라 불렀다가 완벽주의라고 고쳐 불렀고 때로는 의지박약이라고 판정했다. 이름은 자주 바뀌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그렇게 나를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분석은 어느새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판결문이 되어 있었다.

안건은 또 다음 회의로 넘어간다.

심사 중 소멸

이 복잡한 결재 체계는 잘못된 선택을 몇 차례 막아주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마음을 만료시켜 버렸다. 어떤 흥미는 한 계절쯤 머물고, 어떤 충동은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손을 움직여야만 간신히 형태를 얻는다. 모든 마음이 결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식어버린 마음을 들여다보며 역시 진심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리곤 했다. 심사를 거듭하다 마음의 유효기간을 넘겨버린 뒤, 그 효력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다시 반려하는 빈틈없는 행정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관심도 머무는 동안에는 진짜일 수 있다. 매번 진심임을 증명하려다 내가 먼저 지쳐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전 승인제 폐지

그렇다고 이제부터 생각을 덜 하며 살겠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내게 생각을 그만두라는 말은 내부 감사팀에 자진 해산을 권고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 감사팀은 해산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한 별도의 회의부터 열 것이다.

나는 여전히 구조를 파악하는 순간이 좋고, 흩어진 감정을 문장으로 묶어낼 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든다. 다만 생각과 실행의 순서는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도 몇 편을 실제로 써본 뒤에야 조금씩 드러났다. 무엇을 오래 좋아하게 될지, 시작하기 전에 미리 답할 수는 없었다.

시도한 일이 잘 맞지 않더라도 무엇이 나와 맞지 않는지는 알 수 있다. 나에 관한 짤막한 사용 후기 하나가 그렇게 더 생긴다.

방독면과 투구를 쓴 인형이 서류가 쌓인 나무 책상에서 도장을 들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최종 승인 대신 일정 범위의 전결권을 마음에 돌려주기로 했다.

  • 20분 안에 시작할 수 있는 안건은 담당자 전결로 처리할 것.
  •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도 일단 접수할 것.
  • 오늘의 흥미에 향후 5개년 계획을 요구하지 말 것.
  • 흥미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최초 신고까지 허위로 판정하지 말 것.

생각보다 파격적인 운영 방침이다.

최종 검토 생략

이 글 역시 아직 모든 결재를 통과하지 못했다. 비유를 지나치게 오래 끌고 간 것은 아닌지, 중간이 늘어지지는 않는지, 결국 뻔한 교훈에 도착한 것은 아닌지 검토할 부분이 남아 있다.

내일 다시 읽으면 문단 몇 개를 통째로 없애고 싶어질 가능성도 높다. 담당 부서에서는 이미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 우려를 회의록에만 남겨둔 채, 글은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따라서 본 안건을 조건부로 승인한다.

조건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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