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주요 설정과 결말을 모두 다룹니다.
어디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짐작되는데도 끝까지 따라가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처음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던 두 인물이 부딪히고 오해하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가는 이야기. 버디 무비는 대개 그런 익숙한 구도에서 출발하고, 《프로젝트 헤일메리》 또한 이 흐름을 따른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난 후 짙은 여운이 남는 것은, 익숙한 결말로 향하는 동안 생기는 미세한 마찰음을 허투루 넘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도 신체도 감각도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마저 다른 두 존재가 생각 하나를 나누기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해야 하는가.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그 지난한 과정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눈을 뜬 남자, 그리고 뒤늦게 도착하는 진실
라일랜드 그레이스는 모든 것과 단절된 우주 한가운데서 눈을 뜬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차갑게 식은 동료들의 시신 곁에 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과거는 하얗게 지워졌어도 몸에 밴 지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숨 쉬듯 장비의 용도를 짚어내고, 엉뚱한 농담으로 적막을 깨며, 텅 빈 선내를 구석구석 살핀다. 익숙한 장치에 손이 먼저 닿을 때마다 끊겨 있던 기억도 한 조각씩 뒤따라온다.
이 영화는 세계를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는다. 그레이스가 기억의 파편을 하나씩 맞춰 갈 때마다 관객 역시 그와 함께 상황을 이해해 간다.
기억의 빈칸이 채워질수록 처음 우리가 그렸던 그레이스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는 생명에 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내놓았다가 학계의 반발을 샀고, 결국 연구계를 떠나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던 평범한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연구와는 거리를 둔 채 살아가던 그를 다시 불러낸 것은 ‘아스트로파지’였다. 태양의 에너지를 흡수해 증식하는 이 미지의 단세포 생명체가 발견된 후 태양은 점점 어두워졌고,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놓였다. 한때 그레이스를 학계 밖으로 밀어냈던 독특한 이론은 뜻밖에도 아스트로파지를 연구하는 데 필요했고, 그는 인류를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주변의 다른 별들도 비슷하게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유독 타우 세티만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인류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타우 세티로 향하는 편도 우주선 ‘헤일메리호’를 만들었고, 그레이스는 어느새 임무의 중심까지 떠밀려 와 있었다.
출정을 앞두고 원래 임무에 나설 과학 담당자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자, 총책임자 에바 스트라트는 아스트로파지를 가장 잘 아는 그레이스를 대체 과학 담당자로 지목했다.
다만 그레이스에게 우주는 조금도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끔찍할 만큼 두려워했고 편도행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주로 가는 것만큼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스트라트의 결정은 냉혹했다. 그레이스가 빠지면 인류의 생존 가능성 자체가 희박해진다고 판단한 그녀는 그의 공포를 외면한 채 강제로 재워 헤일메리호에 태워 보냈다.
영화는 이 사실을 초반부에 숨겨둔다. 스스로 임무에 나섰으리라 여겼던 관객의 짐작은 그레이스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뒤집힌다.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그는 고장 난 세계를 고치기 위한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되었다.
우주에 홀로 남겨진 그레이스는 믿을 수 없는 존재와 마주한다. 암흑뿐인 우주에 나타난 미지의 우주선,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처럼 홀로 살아남은 지적 생명체 로키.
인류에게 징발된 인간, 그리고 같은 위협에서 제 모성(母星)을 구하기 위해 먼 우주를 건너온 외계인. 전혀 다른 세계에서 출발한 두 존재가 우주 한가운데서 서로를 발견했다.

관계란 끝없는 번역 작업이다
처음 만난 그레이스와 로키는 서로에게 그저 낯선 존재였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대의 언어와 신체 구조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서로를 믿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시각 기관이 없는 로키는 반향과 진동으로 주변을 인지하고 화음에 가까운 소리로 의사를 전한다. 그레이스에게 너무나 당연한 ‘본다’는 경험조차 로키에게는 없다. 각자에게 당연한 것조차 공유할 수 없기에 둘의 대화는 언어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먼저 화음 하나에 ‘하나’라는 뜻을 붙이고, 시계를 사이에 두고 초를 세어 시간의 단위를 맞춘다. 숫자를 공유한 뒤에는 원소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들이 쌓인 뒤에야 서로의 사정을 묻는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시작한 둘만의 사전이 그렇게 한 장씩 두꺼워진다.

그레이스가 통역 장치를 만들고, 둘이 함께 합성 음성을 고르면서 처음에는 뜻 모를 화음이었던 소리는 어느새 관객에게도 ‘로키의 목소리’로 들리기 시작한다.
엇나간 이해의 틈을 메우고, 아직 위태로운 의미 위에 다음 단어를 조심스레 올려놓는 일. 미지의 언어를 해독하는 과정에 마법 같은 도약은 없다. 다만 번역이 고된 노동이라고 해서 그 과정까지 무미건조한 것은 아니다.
대니얼 펨버턴(Daniel Pemberton)의 음악이 흐르는 동안 그레이스와 로키는 까다로운 수식이 풀릴 때마다 격벽을 두드리며 환호하고 서툰 춤을 춘다. 주먹을 맞대며 둘만의 인사도 만들어낸다. 이들에게 번역은 기호와 규칙을 함께 만들어 가며 즐기는 놀이이기도 하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이야기의 숨은 목차처럼 놓여 있다. 곡 제목을 순서대로 이어 놓기만 해도 그레이스와 로키가 가까워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코어
- 〈Barrier Language〉 — 언어의 장벽
- 〈Connection〉 — 연결
- 〈Clock Numbers〉 — 시계 숫자
- 〈Learning to Communicate〉 — 소통을 배우다
- 〈Finding Rocky Voice〉 — 로키의 목소리를 찾다
삽입곡
- 메르세데스 소사 〈Gracias a la Vida〉 — 삶에 감사해
- 비틀즈 〈Two of Us〉 — 우리 둘
그렇게 가까워진 뒤에도 대화는 자주 덜컹거린다. 아직 함께 나누지 못한 개념 하나를 설명하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마다 둘은 다시 주파수를 맞추고 통역기를 두드리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말을 주고받는 동안 익숙해지는 것은 상대의 언어만이 아니다. 말이 어긋나면 다시 뜻을 묻고, 끝내 이해하려 애쓰는 서로의 태도이기도 하다.
어쩌면 누군가의 궤도에 들어설 때마다 우리는 늘 서툰 번역가가 되는지도 모른다.
상대의 낯선 표정과 침묵, 그 뒤에 숨었을 두려움까지도 우리는 저마다의 낡은 사전을 뒤적이며 그 뜻을 짐작할 뿐이다.
말이 마음을 온전히 옮기지 못하는 순간은 둘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헤일메리호 승무원들을 떠나보내는 송별 자리에서 스트라트는 항공모함 갑판에 서서 해리 스타일스의 〈Sign of the Times〉를 부른다.
늘 명령과 판단을 앞세우던 스트라트가 그때만큼은 설명 대신 노래를 택한다. 다른 이들의 두려움을 뒤로한 채 수많은 결정을 내려오던 사람에게도 쉽게 말로 옮길 수 없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짊어진 무게
그레이스가 혼자 잠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키는 그를 지켜보겠다고 고집한다. 자신이 잠든 사이 동료들을 잃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잠을 지켜보고 상대의 안전을 걱정하는 일이 어느새 자연스러워진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시작된 대화에 조금씩 서로를 향한 마음이 끼어든다.
그레이스가 돌아갈 연료가 없어 임무를 마치면 우주에서 죽게 된다고 털어놓자, 로키는 귀환이 늦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필요한 연료를 나눠주겠다고 한다. 애써 괜찮은 척하던 그레이스는 그제야 자신도 죽고 싶지 않았다고 인정하며 로키를 끌어안는다.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말에 담긴 무게까지 헤아리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벽을 부수고 넘어온 쪽도 로키였다. 타우 세티의 행성에서 시료를 채취하던 중 예기치 못한 사고로 우주선이 크게 요동치고 격실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벽을 깨고 건너온다. 화음을 나누고 시료를 주고받으며 환호하던 둘 사이의 투명한 창, 곧 서로를 죽이지 않기 위해 지켜야 했던 경계선을 제 손으로 부숴낸 것이다.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버리고 타인의 세계로 뛰어든 대가로 로키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치명상을 입는다.
로키가 회복하는 동안 그레이스는 둘이 채취한 시료 속에서 아스트로파지를 포식하는 미생물을 찾아낸다. 그는 타우 세티와 아메바를 합쳐 ‘타우메바’라는 이름을 붙인다.
아스트로파지는 별빛을 먹어치워 두 행성을 위기로 몰아넣은 생명체인 동시에 헤일메리호와 로키의 우주선을 움직이는 연료이기도 했다. 타우메바를 각자의 행성으로 보내 아스트로파지를 억제할 수 있다면 지구와 에리드 모두를 구할 수 있었다.
둘은 타우메바를 각자의 행성 환경에서도 살아남도록 진화시켜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다. 로키가 건넨 연료 덕분에 그레이스에게도 살아서 지구의 흙을 다시 밟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귀환 도중 문제가 생긴다.
타우메바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소재마저 통과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이다. 헤일메리호에서는 가까스로 오염을 막았지만, 로키의 우주선은 선체 자체가 그 소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타우메바가 빠져나와 연료인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면 로키는 우주 한가운데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구하러 항로를 돌리면 이번에는 그레이스가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레이스는 인류를 구할 타우메바와 연구 자료를 무인 탐사선에 실어 지구로 보낸다.
그리고 항로를 돌린다.
자신을 위해 경계를 부수고 건너왔던 로키가 이번에는 우주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 그레이스가 지구로 돌아갈 길을 저버린 것은 로키가 먼저 건네온 마음에 대한 응답이었을 것이다.
떠맡겨진 책임 앞에서는 끝까지 우주행을 거부했던 그레이스가, 스스로 선택한 책임 앞에서는 기꺼이 지구로 돌아갈 길까지 포기한다.
이야기를 따라온 스코어의 목차도 이 대목에서 마지막 장에 닿는다.
- 〈Rocky Sacrifice〉 — 로키의 희생
- 〈Wake Up Buddy〉 — 일어나, 친구
- 〈Goodbye My Friend〉 — 잘 가, 내 친구
- 〈Amaze Amaze Amaze (Life on Erid)〉 — 놀라워 놀라워 놀라워: 에리드에서의 삶
에리드인들이 그레이스를 위해 만든 작은 바닷가에서 둘은 다시 나란히 앉는다. 로키는 에리드의 과학자들이 헤일메리호를 다시 지구로 보낼 준비를 해둘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레이스는 생각해보겠다고 답하고, 에리드의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향한다.
한때 서로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던 둘은 이제 별일 없는 하루를 함께 보낸다.
이 평범한 하루는 서로의 문제를 자기 삶 바깥에 두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가끔 좋은 관계란 서로를 지치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소모하지 않고, 필요하면 언제든 거리를 둘 수 있는 관계. 하지만 누군가가 소중해지고 나면 그의 문제는 좀처럼 내 삶의 바깥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
구원은 단수로 오지 않는다
‘헤일메리’는 본래 기도를 뜻하지만, 미식축구에서는 경기 막판에 던지는 성공 확률이 희박한 마지막 장거리 패스를 가리킨다. 그 이름처럼 인류가 우주를 향해 띄운 헤일메리호 또한 일종의 절망적인 기도에 가까웠다.
무모하게 던져진 패스가 긴 어둠을 건너 누군가에게 가닿고, 뜻밖의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 다시 돌려주는 일. 이 영화가 말하는 헤일메리는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기어이 서로에게 닿는 이야기다.

곁을 내어준다는 건 서로를 빈틈없이 읽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끝을 맺을 수 없는 문장들을 마주하고서도 내일 다시 사전을 펼쳐 들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일. 시들지 않는 인사란, 아마 그런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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