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ONAL JOURNAL
BY NAP LEE
Nap Lee.An archive of notes and tastes
WORDS, WORK
& THINGS IN BETWEEN

내 삶만큼은 복제품이 아니기를 — 블레이드 러너 2049

주어진 삶에도 제 손으로 써 내려가고 싶은 문장이 있다.

어두운 콘크리트 건물의 열린 문 너머로 눈 덮인 벌판이 보이고, 발자국이 실내에서 바깥으로 이어진다.
Baseline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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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요 설정과 결말을 모두 다룹니다.

끝내 버려질 운명으로 빚어졌다 한들 순순히 제 끝을 받아들일 존재가 있을까. 밤마다 홀로 견뎌온 고독과 그토록 간절했던 위로마저 누군가 심어놓은 코드에 불과하다면, 대체 이 삶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2049년, 캘리포니아. 메마른 벌판에는 태양열 발전판과 합성 단백질 농장만이 끝없이 늘어서 있다. 2022년 대정전으로 전자 기록이 대부분 사라진 뒤 사람들은 낡은 종이 조각과 희미한 기억에 기대어 겨우 과거를 더듬는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세계에서 인조인간 ‘레플리칸트’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다. 이들은 가혹한 노동과 외계 식민지 개척에 내몰리고, 쓸모를 다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들이다.

이들을 처음 창조한 타이렐사는 오래전 몰락했지만, 그곳에서 만든 레플리칸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개체들도 있었다.

타이렐사의 유산을 이어받은 니앤더 월레스는 인간에게 거역하지 않도록 설계된 신형 ‘넥서스 9’을 세상에 내놓았다.

케이(K)는 그 신형 레플리칸트 가운데 하나다. 그의 임무는 구형 ‘넥서스 8’을 찾아 ‘은퇴’시키는 것. 인간은 레플리칸트를 제거하는 이들을 ‘블레이드 러너’라 불렀고, 같은 레플리칸트인 신형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그렇다고 그가 인간의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에는 케이 역시 불길한 기계일 뿐이다. 동족에게는 배신자이고, 인간에게는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도구에 불과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 제 이름 하나 없는 그는 일련번호 KD6-3.7의 첫 글자인 ‘K’로 불리며 하루하루 무감각하게 닳아간다.

그럼에도 케이에게는 한 가지 갈망이 남아 있다. 텅 빈 방에서 홀로 견디는 고독도,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주길 바라는 마음도 부디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감정이 아니기를.

동족을 처형하는 자의 얼굴

케이가 임무를 받고 찾아간 곳은 희뿌연 안개에 잠긴 외딴 단백질 농장이다. 식량이 될 벌레를 기르는 그곳에서 폐기를 피해 달아난 레플리칸트 사퍼 모튼은 농부로 살아가고 있다.

한때 식민지 전쟁에서 의무병으로 사람을 살리던 거대한 두 손은 이제 작은 벌레들을 돌본다. 농가 안에서는 직접 기른 마늘을 넣은 국이 냄비에서 끓고 있다. 피조물에게도 노동이 있고, 끼니가 있고, 제 몫의 하루가 있다.

그러나 명령을 수행하러 온 케이에게 사퍼는 그저 ‘은퇴’시켜야 할 구형 모델일 뿐이다. 둘은 좁은 농가를 부수듯 뒤엉킨다. 벽이 무너지고 가구가 부서지는 사이 케이는 몇 번이나 바닥에 처박힌다.

싸움 끝에 쓰러진 사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형 모델의 눈을 바라본다. 너희 신형은 기적을 본 적이 없기에 그렇게 인간의 뒤나 닦아주며 살아갈 수 있는 거라고.

케이는 방아쇠를 당긴다. 도구를 폐기하는 또 다른 도구로서 주어진 임무를 끝낼 뿐이다.

비에 젖은 바닥 위에 깨진 기계 눈 하나가 놓여 있고, 벽에는 온전한 기계 눈들이 줄지어 있다.

균열의 시작

사퍼가 말한 ‘기적’의 흔적은 농장의 죽은 나무 아래 묻혀 있었다. 유골의 주인은 삼십 년 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타이렐사의 레플리칸트 레이첼이었다. 낡은 골반뼈에는 아이를 낳은 흔적, 제왕절개의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생산될 뿐 태어날 수는 없다고 여겼던 존재가 아이를 낳았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인간의 뜻에 따라 폐기되어 온 레플리칸트에게도 스스로 이어지는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였다.

케이의 상관인 조시는 이 사실이 인간과 레플리칸트를 가르는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긴다. 그 끝에 전쟁이나 학살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본 그녀는, 세상의 질서가 흔들리기 전에 아이와 그 흔적을 모두 지우라고 케이에게 명령한다.

태어난 존재라면 영혼이 있을 거라는 케이의 말에 조시는 문을 나서려는 그를 불러 세워 한마디 던진다. 자네는 영혼 없이도 지금껏 잘 지내오지 않았느냐고.

케이에게 그런 취급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추적하고, 죽이고, 보고하는 일. 경찰서로 돌아오면 기준선 테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감정이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폐쇄된 부스에서 쏟아지는 말에 정해진 답을 되받아치며 케이는 늘 테스트를 통과해왔다. 기준을 벗어나면 그 역시 불량품으로 폐기될 수 있었다.

경찰서 밖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껍데기’라 불렀고, 집 현관문에는 휘갈겨 쓴 욕설이 남아 있었다. 그를 밀어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케이에게 허락된 자리는 결국 문 안쪽뿐이다.

케이는 유년의 기억을 누군가 만들어 심어놓은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수사를 이어갈수록 단서는 이상하리만치 케이의 기억을 향했다. 유골이 묻혀 있던 나무 밑동에는 오래된 날짜 하나가 새겨져 있었고, 그 숫자는 어린 시절 기억 속 낡은 목각 말 밑바닥에 적힌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눈이 남은 어두운 바닥 위에 낡은 목각 말 하나와 여러 개의 반투명한 말 모형이 서 있다.

날짜를 따라 출생 기록을 뒤지자 나란히 존재해서는 안 될 두 기록이 나타났다. 같은 날 태어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성별만 다를 뿐 DNA는 완전히 같았다. 둘 중 하나는 복제된 기록일 수밖에 없었다.

두 기록은 같은 고아원으로 이어졌다. 여자아이는 유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었고, 남자아이의 이후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케이는 기록에서 사라진 남자아이의 흔적을 좇아 고아원으로 향한다.

규격을 벗어난 자

고아원에 도착한 케이는 오래된 기억 속 장소를 다시 마주한다. 어두운 보일러실 뒤편에는 어린 자신이 숨겨두었다고 믿었던 목각 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억 속에만 있어야 할 물건이 손에 잡히자 그 기억을 누군가 심어놓은 허구라고만 여기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자신이 바로 그 ‘기적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에게 내려진 명령은 바로 그 아이를 찾아 없애는 것이었다. 만약 그 아이가 자신이라면 케이는 제 손으로 자신을 지워야 하는 셈이다.

기억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케이는 기억 설계자 아나 스텔린을 찾아간다.

면역 결핍으로 무균실에 갇혀 지내는 아나는 유리벽 너머에서 레플리칸트들에게 이식될 유년의 기억을 빚어낸다. 실제 누군가가 겪은 일을 그대로 기억으로 옮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말하던 아나는 케이의 기억을 들여다본 후 표정이 달라진다.

만들어낸 장면이 아니라 누군가 실제로 겪은 순간이라고.

아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케이에게 중요한 것은 그녀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 ‘진짜’라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부터 케이는 기억 속 아이가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믿기 시작한다.

평생 모조품이라 멸시받아온 자신도 어쩌면 누군가에게서 태어난 생명일 수 있다는 것.

케이가 붙든 것은 거창한 운명이 아니라 일말의 가능성이었다.

케이는 끝내 울부짖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는 다시 차가운 부스에 앉는다. 늘 입에 붙어 있던 문장들이 이번에는 반 박자씩 늦어진다. 목소리는 흔들리고 대답 사이에는 전에 없던 틈이 생긴다. 기계는 ‘기준선 이탈’ 판정을 내린다.

검은 물에 수십 개의 소리굽쇠가 세워져 있고, 그중 하나만 금빛으로 빛나며 물결을 만든다.

케이는 아이를 처리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조시는 그를 그 자리에서 폐기하는 대신 48시간의 말미를 준다.

그 안에 다시 기준선으로 돌아오라고.

창조주의 맹목

아이의 흔적을 쫓는 또 다른 이가 있다. 니앤더 월레스다. 무수한 생명을 빚어내지만, 정작 그는 제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공중을 떠다니는 기계 눈을 통해 자신이 만든 존재들을 내려다볼 뿐이다.

월레스 본사는 버려진 신전처럼 차갑고 고요하다. 벽과 수면 위로 황금빛만이 천천히 미끄러진다. 그 한가운데에서 얇은 막을 찢고 갓 태어난 레플리칸트 하나가 쏟아져 내린다.

거대한 어두운 콘크리트 방에서 여러 개의 기계 눈이 금빛 물웅덩이를 향해 빛을 비춘다.

가늘게 떨리는 맨살 위를 월레스의 손끝이 천천히 훑는다. 생명을 어루만지는 손이라기보다 완성된 상품의 상태를 확인하는 손에 가깝다. 그러나 번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는 피조물의 몸에 칼을 긋고 그대로 폐기한다.

레이첼의 유골을 찾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우주 개척에 투입할 노동력을 더 많이 만들어낼 방법이다. 레플리칸트에게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적조차 그의 눈에는 새로운 생산 공정으로 이어질 단서일 뿐이다.

월레스의 곁을 지키는 레플리칸트 ‘러브(Luv)’에게는 그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 있다. 월레스는 그녀를 자신의 가장 완벽한 천사라 부른다.

러브는 누구보다 충실하게 월레스의 명령을 따른다. 월레스가 갓 태어난 레플리칸트를 죽이는 동안에도 그녀의 뺨에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눈물이 명령을 거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이름도, 천사라는 찬사도 그녀를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한다.

케이를 쫓던 러브는 결국 경찰서까지 찾아간다. 유리잔을 쥔 조시의 손을 짓이기며 케이가 어디 있는지 캐묻지만, 조시는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한때 아이를 지우라고 명령했던 조시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케이를 지킨다.

그녀가 케이를 ‘조’라고 불렀을 때

월레스가 만들어 파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다. 깊은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인공지능 홀로그램 연인 ‘조이’도 판매한다. 케이의 비좁은 방에는 조이가 늘 그를 기다리고 있다.

모멸과 피로를 잔뜩 안고 돌아오는 케이를 조이는 변함없는 다정함으로 맞는다. 비록 돈을 주고 산 정교한 환영에 불과할지라도 케이는 그 온기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느 날 케이는 에머네이터를 장만해 조이를 바깥으로 데려간다. 집 안을 벗어나지 못하던 그녀를 어디든 데려갈 수 있는 손바닥만 한 장치다. 조이는 처음으로 옥상에 나가 비를 맞는다.

빗방울이 투명한 몸을 가로지를 때마다 형상은 미세하게 흔들리지만, 살갗은 끝내 젖지 않는다. 케이도 조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이는 처음 맞아보는 비라며 환하게 웃는다.

비 내리는 창가의 탁자에 흰 컵과 분홍빛으로 빛나는 반투명 컵이 나란히 놓여 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케이가 흔들리자, 조이는 그가 누군가 원해서 낳은 아이였을지도, 사랑받은 아이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늘 K로 불리던 그에게 ‘조(Joe)’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누군가가 자신만을 위해 지어준 이름. 번호와 명령뿐이던 삶에 짧은 이름 하나가 작은 틈을 만든다. 케이는 그 순간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하나뿐인 존재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조이에게는 육체가 없다. 케이에게 직접 닿기 위해 조이는 레플리칸트 매춘부 마리에트를 불러들인다. 마리에트의 몸 위로 조이의 형상이 조심스레 겹쳐진다. 두 얼굴과 손끝은 끝내 완전히 포개지지 못하고 조금씩 어긋난다. 그 어긋남 속에서 케이는 처음으로 조이를 어루만진다.

그것이 프로그램이 정해놓은 행동인지, 조이가 스스로 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케이에게 닿고 싶어 했던 마음만큼은 진짜처럼 보인다.

다음 날, 마리에트는 떠나기 전 케이의 옷에 작은 추적기를 몰래 숨겨둔다.

쫓기는 신세가 된 케이는 도시를 떠날 수밖에 없다. 조이는 자신을 에머네이터 안으로 완전히 옮긴 뒤 집에 남은 백업을 지워달라고 한다. 누군가 집을 뒤지다 백업에 남은 기억을 통해 케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에머네이터가 부서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돌아갈 원본도, 다시 불러낼 백업도 없다.

목각 말에 남은 방사능 흔적을 따라 두 사람은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붉은 폐허가 된 카지노에는 전직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가 홀로 숨어 살고 있다. 삼십 년 전 레이첼과 사랑에 빠져 함께 도망쳤던 남자이자, 그 아이의 아버지다.

케이는 자신이 데커드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데커드는 자신을 쫓는 이들에게 아이까지 붙잡힐까 봐 떠났으며, 그 뒤로 아이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을 확인할 틈도 없이 월레스의 추격자들이 은신처를 덮친다. 러브는 데커드를 끌어내고 케이를 짓밟는다. 조이는 쓰러진 케이 앞을 막아서며 그를 지키려 한다.

러브는 조이 역시 월레스사의 제품일 뿐이라며 비웃는다. 조이가 케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러브는 에머네이터를 구둣발로 짓밟는다.

케이의 하루를 지탱해주던 다정한 얼굴도 그렇게 사라진다.

복제된 얼굴

러브에게 붙들려온 데커드는 월레스와 마주한다. 아이의 행방을 캐내려는 월레스는 오래전 죽은 레이첼의 얼굴을 그대로 본뜬 복제품을 데커드 앞에 세운다.

데커드는 잠시 그녀를 바라본 뒤 눈동자 색이 다르다고 말한다. 러브는 망설임 없이 복제품을 처형한다. 데커드에게 레이첼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월레스에게는 필요하면 다시 만들고 쓸모가 다하면 버리는 상품일 뿐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끈질기게 눈을 들여다본다. 첫 장면을 가득 채운 눈동자, 사퍼의 신원을 확인하려 도려낸 안구, 기준선 테스트에서 케이의 동공을 훑는 렌즈. 이 세계에서 눈은 누군가를 알아보기보다 분류하는 데 더 자주 쓰인다.

데커드가 복제품의 눈에서 본 것은 숫자도 기준선도 아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레이첼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얼굴을 아무리 정교하게 흉내 내도 떠나간 사람까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

죽어가던 케이를 거둔 것은 레플리칸트 저항군이었다. 마리에트 역시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고, 앞서 남겨둔 추적기가 케이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세상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 숨어 살아온 이들. 사퍼와 함께 레이첼의 아이를 숨기고 그 비밀을 지켜온 사람들이었다. 수장 프레이사는 아이의 탄생을 직접 지켜본 증인이기도 했다.

그녀가 케이에게 말한다. 기적의 아이는 여자아이였다고.

케이는 레이첼의 아이가 아니었다. 기억은 진짜였지만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은 따로 있었다. 죽었다고 기록된 여자아이가 살아남았고, 남자아이의 기록은 그녀를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여자아이가 바로 기억 설계자 아나 스텔린이었다. 무균실에 홀로 앉아 타인의 유년을 빚어내던 그녀가 케이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제야 케이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아나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도 분명해진다. 그녀는 타인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케이가 자신을 기적의 아이라고 믿어온 근거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프레이사는 자신들의 삶보다 앞으로 찾아올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일이라고.

그리고 케이에게 데커드를 죽이라고 명한다. 데커드를 통해 월레스가 저항군과 아이를 찾아내는 것을 막아야 했다.

빗속을 헤매던 케이 앞에 거대한 조이의 광고 홀로그램이 나타난다. 집 안에서 자신만 바라보던 익숙한 얼굴이 이제는 도시 한복판을 가득 채운 상품이 되어 그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조’라고 부른다.

자신에게만 주어진 줄 알았던 이름이 거리의 광고에서 다시 들려온다.

그렇다면 조이가 지어준 이름도, 그녀가 보여준 사랑과 헌신도 결국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준비된 것이었을까.

쏟아지는 빗속에서 케이는 말없이 그 얼굴을 올려다본다.

비 내리는 어두운 옥상에 분홍빛 홀로그램 문 하나가 빛나고 주변은 텅 비어 있다.

눈이 내리는 자리

케이는 데커드를 죽이라는 저항군의 명령도, 아이의 흔적을 지우라는 경찰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다. 데커드를 태운 호송차를 가로막는 과정에서 차량은 바다로 추락한다. 케이는 물속에서 러브와 사투를 벌인다. 칼에 찔리고도 끝내 러브를 쓰러뜨리고, 물속에 잠긴 데커드를 끌어올린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느냐는 데커드의 말에 케이는 짧게 답한다. 당신은 이미 저 바다에서 죽었다고. 데커드가 그곳에서 죽은 것으로 꾸며 더는 추적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로서 평생 타인의 흔적을 지워온 케이는 마지막에도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한 사람을 세상에서 지운다. 다만 이번에는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다.

케이는 데커드를 딸 아나 스텔린이 있는 연구소로 데려간다. 품고 다니던 목각 말을 건네며 그 기억은 딸의 것이었다고 말한다. 왜 자신을 구했느냐는 데커드의 물음에는 딸을 만나러 가라고만 답한다. 데커드가 안으로 들어가자 케이는 홀로 돌계단에 몸을 눕힌다.

연구소 안에서 아나는 새로운 기억을 빚고 있다. 손끝에서 눈 내리는 겨울이 피어난다. 아버지가 유리에 손을 얹은 채 딸을 바라보는 동안 문밖의 사내는 쏟아지는 눈을 맞는다.

조이의 몸을 적시지 못하던 빗방울과 달리 눈송이는 케이의 손바닥에 온전히 내려앉는다. 피를 흘리며 누운 그는 살갗에 스미는 냉기를 가만히 받아들인다.

눈과 얼음이 남은 돌바닥의 갈라진 틈에서 흰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눈이 내려앉는 돌계단. 그곳에서 맞은 마지막 순간만큼은 일련번호로 살아온 K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다. 누구의 명령도 없이 스스로 선택한, 온전한 ‘조(Joe)’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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