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 – 내 삶이 복제품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

흔적도 없이 흩어질 운명이었던 존재들이, 끝내 살아남아 숨을 이어가는 이유.

어두운 콘크리트 건물의 열린 문 너머로 눈 덮인 벌판이 보이고, 발자국이 실내에서 바깥으로 이어진다.
이 글의 음악 Baseline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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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요 설정과 결말을 모두 다룹니다. 작품을 아직 감상하지 않았다면, 감상 후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끝내 버려질 운명으로 빚어졌다 한들, 순순히 제 끝을 긍정할 존재가 있을까. 밤마다 홀로 감내해 온 고독과 그토록 간절했던 위로마저 누군가 심어 놓은 일련의 코드에 불과하다면, 대체 이 삶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2049년, 캘리포니아. 생태계는 오래전 무너져 내려 풀 한 포기 돋지 않고, 메마른 벌판을 덮은 것은 끝없이 늘어선 태양열 발전판과 단백질을 찍어내는 합성 농장들뿐이다.

2022년 서부 상공에서 터진 핵은 세상의 모든 기록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장부도, 호적도 눈먼 빛과 함께 증발해 버렸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낡은 종이 조각과 뼈에 새겨진 흔적에 기대어 간신히 과거를 더듬을 뿐이다.

훗날 이 공백이 한 아이의 존재를 세상에서 완벽히 지워 주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세계에서 인간을 닮은 인조인간, ‘레플리칸트’는 철저히 소모품으로 생산되고 착취당한다. 가혹한 노동과 외계 식민지 개척에 내던져진 이들은 효용 가치가 다하면 가차 없이 폐기되는 존재다.

이들을 처음 창조한 타이렐사는 오래전 몰락했고 그 유산은 니앤더 월레스의 손에 넘어갔다. 타이렐이 남긴 구형 ‘넥서스 8’은 정해진 수명이 없고 명령을 거부할 자유 의지가 남아 있는 반면, 월레스가 새롭게 개발한 신형 ‘넥서스 9’은 설계 단계부터 절대적인 복종이 각인되어 있다.

인간은 언제든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 있는 구형 모델들에게 ‘은퇴’라는 명목을 씌워 합법적인 사냥에 나선다. 그리고 그 잔혹한 임무를 다름 아닌 신형 레플리칸트에게 맡긴다. 결국 사냥꾼과 사냥감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형제인 셈이다. 단지 한쪽이 맹목적으로 순종하도록 만들어졌을 뿐.

케이(K)는 이 견고한 질서의 집행자인 동시에 철저한 피해자다.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설계된 신형 레플리칸트이자 동족을 사냥하는 블레이드 러너. 그는 명령을 어기고 달아난 구형 모델들을 추적해 파괴한다. 인간의 안위를 위해 기어이 동족의 숨통을 끊어야만 하는 모순. 케이의 이야기는 이 저주받은 굴레 속에서 시작된다.

그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눈에 그는 그저 불길한 기계일 뿐이며, 동족의 눈에 그는 피를 묻힌 배신자에 불과하다. 철저한 이방인. 온전한 이름 한 글자조차 갖지 못한 채, 그는 일련번호 KD6-3.7의 첫 알파벳으로만 불리며 하루하루 무감각하게 닳아 간다.

그럼에도 케이에게는 아직 폐기되지 못한 갈망이 남아 있다. 텅 빈 방에서 마주하는 시린 고독과, 매일 밤 누군가 자신을 기다려 주기를 바라는 그 애달픈 마음만큼은, 부디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환상이 아니기를.

동족을 처형하는 자의 얼굴

첫 번째 임무가 케이를 이끈 곳은 흙먼지 날리는 조용한 농장이었다. 오직 바람만이 메마른 창문을 두드리는 그곳에 자신을 지우고 살아가는 레플리칸트 사퍼 모튼이 있었다.

그는 은퇴를 거부하고 도망친 넥서스 8 모델이었다. 폐기 명령을 피해 지구의 흙 속으로 파고든 그 순간부터 그가 숨을 쉰다는 사실 자체가 곧 범죄였다.

한때 위생병으로 전장을 누볐을 거대한 두 손은 이제 말없이 흙을 어루만진다. 마치 피조물이 흙의 온기를 빌려 제 삶을 증명하려 애쓰는 듯한 풍경.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물건’인 그는, 어째서 저물어 가는 볕 아래서 그토록 온전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그 늙고 지친 얼굴 뒤에 숨겨진 것은 단순한 도망자의 사연만이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근간을 뒤엎을 비밀을 오래도록 지켜 온, 몇 안 되는 증인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수행하러 온 케이에게 사퍼의 내면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는 그저 ‘은퇴’시켜야 할 구형 모델일 뿐. 둘의 몸이 부딪치고, 벽이 무너지고, 케이는 몇 번이나 바닥에 처박힌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사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신형 모델의 눈을 응시했다. 너희 신형은 기적을 본 적이 없기에, 그렇게 인간의 뒤나 닦아주며 살 수 있는 거라고. 겨우 몸을 일으킨 케이는 방아쇠를 당긴다. 자신이 방금 어떤 거대한 비밀을 묻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도구를 폐기하는 또 다른 도구로서 임무를 완수할 뿐이었다.

비에 젖은 바닥 위에 깨진 기계 눈 하나가 놓여 있고, 벽에는 온전한 기계 눈들이 줄지어 있다.

하지만 사퍼의 죽음은 단순한 실적 보고서의 한 줄로 끝나지 않는다. 사퍼가 남긴 마지막 말과 농장 구석에 묻혀 있던 흔적은 이내 케이를 서류 밖으로 끌어당긴다.

균열의 시작

사퍼의 숨통을 끊어 놓고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기적’이라는 단어. 구형 모델이 뱉어낸 헛소리인 줄만 알았던 그 두 글자가, 케이의 완벽히 통제된 세계 속에 박혀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농장의 죽은 나무 아래서 파낸 유골함이 그 실체였다. 뼈의 주인은 삼십 년 전 세상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타이렐사의 레플리칸트, 레이첼. 낡은 골반뼈에는 제왕절개의 흔적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흉터가 가리키는 것은 분명했다. 생산될 뿐 결코 태어날 수 없다는 이 세계의 견고한 근간이 속절없이 뒤집힌 것이다. 레플리칸트들에게는 스스로 주인이 될 피 묻은 명분이었으나,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인간 사회에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경찰 조직은 이 불온한 진실을 서둘러 덮으려 했지만, 증거는 자꾸만 케이의 기억을 가리켰다. 유골을 품고 있던 나무 밑동에 새겨진 오래된 날짜. 수사의 단서가 된 그 숫자는 케이의 머릿속에 주입된 기억, 그 낡은 목각 말 밑바닥에 새겨진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눈이 남은 어두운 바닥 위에 낡은 목각 말 하나와 여러 개의 반투명한 말 모형이 서 있다.

그 날짜를 쥐고 출생 기록을 뒤지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 걸려 올라왔다. 같은 날 태어난 남녀 한 쌍. 유전 정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겹치면서도 성별만은 다른,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쌍둥이였다. 기록 속 여자아이는 유전 질환으로 일찍 숨을 거두었고 남자아이만이 외딴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케이는 살아남은 한쪽의 옅은 자취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치밀하게 설계해 놓은 갈림길인 줄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수사관의 시선으로 단서를 좇던 그는, 그 순간 사건의 한복판에 선 당사자가 되어버렸다.

자신이 그 ‘기적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가설. 케이가 이 위태로운 믿음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 역시 공장에서 조립되어 폐기되는 소모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몸에서 태어나 고유한 과거를 부여받은 온전한 ‘생명’일지도 모른다는 갈망 때문이었다. 세상을 구원할 영웅적인 운명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가 간절히 원한 것은 자신에게도 어머니의 몸에서 비롯된 진짜 ‘시작’이 존재했다는 단 하나의 증명뿐이었다.

규격을 벗어난 자

체제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생식 능력 그 자체가 아니다. 태어난 존재의 내면에 깃든 ‘영혼’에 대한 믿음이다. 레플리칸트가 스스로 영혼을 가졌다고 믿는 순간, 견고했던 통제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테니까.

케이의 상관 조시 경위는 그 아이를 찾아내 흔적도 없이 폐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만약 케이 자신이 그 아이라면 제 손으로 자신을 지워야 한다. 태어난 존재와 만들어진 존재 사이에 과연 그리 큰 차이가 있느냐는 케이의 물음에, 조시는 대수롭지 않게 응수한다. 자네는 영혼 없이도 여태 잘 지내 오지 않았느냐고.

케이의 시간은 오래도록 완벽한 통제 아래 묶여 있었다. 추적, 살상, 보고. 이 궤도 끝에 남는 것은 텅 빈 방의 어둠으로 스며드는 무채색의 일상뿐이다. 경찰서에서도, 낡은 아파트에서도 사람들은 그를 ‘껍데기’라 부르며 멸시한다. 현관문에 흉터처럼 갈겨 놓은 욕설은 아무리 지워내도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돋아난다. 그가 돌아갈 곳은 오직 그 모욕적인 문 안쪽뿐이다.

고단한 임무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기준선 테스트. 폐쇄된 부스는 케이 내면의 균열을 가장 노골적으로 파헤치는 공간이다. 조사관이 쏟아내는 기형적인 단어들의 폭격 속에서 기계는 흔들리는 케이의 동공을 훑어 내린다. 기준선 테스트는 레플리칸트가 감정적 동요 없이 규격 안에 머물고 있는지 판별하는 장치다. 케이는 매번 기계적으로 대답하며 자신에게 인간의 마음 따위는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 찰나의 떨림이라도 발각되는 즉시 불량품으로 폐기될 테니까.

그러나 그토록 단단하던 케이를 뒤흔든 것은 내면에 심어진 유년 시절의 기억 한 조각, 고아원의 어두운 아궁이 속에 숨겨 두었던 말 모양의 낡은 목각 인형이었다.

기억 설계자 아나 스텔린은 무균실에 갇힌 채 레플리칸트들의 머릿속에 이식될 유년기를 빚어내는 창조자다. 면역 결핍으로 단 한 번도 유리벽 밖을 나서 본 적 없는 그녀는, 실제 경험을 기억으로 이식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고 케이에게 일러 준다.

케이의 기억을 깊숙이 들여다본 그녀는, 그것이 누군가 실제로 겪은 ‘진짜 기억’임을 확인해 준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눈빛을 보며 케이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연민이라 믿는다. 케이는 끝내 격정을 터뜨리고 만다. 평생을 모조품이라 멸시받으며 감정을 거세당해 온 기계가,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태어난 ‘진짜 생명’임을 확신하며 토해낸 최초의 통곡.

자신의 과거가 진짜임을 깨달은 순간 케이의 기준선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린다. 감정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다시 마주한 밀실. 케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엇나가고 대답의 템포는 지연된다. 기계는 가차 없이 그를 ‘기준선 이탈’로 규정한다. 철저한 통제 사회에서 그것은 곧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검은 물에 수십 개의 소리굽쇠가 세워져 있고, 그중 하나만 금빛으로 빛나며 물결을 만든다.

하지만 조시는 즉시 그를 폐기하는 대신 48시간의 말미를 허락한다. 그동안의 실적을 핑계로 삼았으나 그것이 진심의 전부는 아니었다. 훗날 월레스의 수하가 유리잔을 쥔 손을 잔혹하게 으스러뜨리며 케이의 행방을 캐물었을 때도, 조시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아이를 지우라 명령했던 자가 마지막 순간 지켜 낸 것은 체제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였다.

그렇게 살아남아 규격의 바깥으로 밀려난 케이는 비로소 누구의 명령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를 좇아 걷기 시작한다.

창조주의 맹목

케이가 추적하는 진실의 대척점에는 기업가 니앤더 월레스가 자리한다. 무수한 생명을 주조해 내는 이 오만한 창조주는 정작 제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허공을 부유하는 몇 개의 기계 눈을 띄워 둔 채 그는 오직 그것들을 빌려 세계를 넘겨다볼 뿐이다. 월레스 본사 내부는 버려진 신전처럼 차갑고 고요하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황금빛 조명이 비추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자의 얼굴뿐이다.

거대한 어두운 콘크리트 방에서 여러 개의 기계 눈이 금빛 물웅덩이를 향해 빛을 비춘다.

그곳에서 끈적한 양수를 찢고 신형 레플리칸트가 쏟아져 내린다. 비닐 포장 같은 막을 뚫고 나온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없다. 바들바들 떠는 갓 태어난 살갗 위로 월레스의 손끝이 매끄럽게 미끄러진다. 그러나 그것은 출하된 상품의 불량 여부를 가늠하는 감정사의 차가운 손길일 뿐이다. 번식 기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월레스는 피조물의 몸에 무심하게 메스를 그어 폐기해 버린다. 그에게 레이첼이 남긴 뼈란 우주 개척을 위한 공장의 생산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줄 한낱 생물학적 특허품이다.

그 성역을 지키는 문지기는 레플리칸트 ‘러브(Luv)’다. 월레스는 그녀를 자신의 가장 완벽한 천사라 부르며 손수 이름까지 쥐여 주었다. 이름을 하사받은 피조물답게 그녀는 누구보다 충직하다. 주인의 명령을 받들어 인간의 목을 꺾고 동족의 숨을 끊어내는 바로 그 찰나에도 그녀의 뺨 위로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사받은 이름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는 매번 제 영혼의 안쪽을 가차 없이 배반한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 곧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이름을 ‘누가’ 쥐여 주었는지가 끝끝내 족쇄처럼 남기 때문이다.

훗날 러브의 손에 결박되어 온 노인 하나가 월레스 앞에 선다. 삼십 년 전 레이첼과 함께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전직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다. 월레스는 그에게서 정보를 캐내고자 옛 연인 레이첼과 완벽히 동일한 복제품을 주조해 세워 둔다. 그러나 데커드가 눈동자 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짜를 밀어내자, 러브는 망설임 없이 복제품을 처형한다. 기업의 막대한 이윤 앞에서는 목숨도, 과거의 애틋한 기억도 즉각 폐기 처분되는 소모품이다. 월레스의 무균실 같은 성역에는 ‘생명’이라는 유기적인 기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감겼다 뜨이던 첫 장면의 눈동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도려내던 사퍼의 안구, 매번 케이의 동공을 훑어 내리던 밀실의 렌즈. 이 세계에서 ‘본다’는 것은 곧 ‘알아본다’는 뜻이다. 그러니 데커드가 눈동자 색 하나로 가짜를 단박에 알아본 것은 결코 사소한 트집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생명을 빚어낸 오만한 창조주만이, 끝끝내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남겨진다.

그녀가 나를 ‘조’라고 불렀을 때

월레스사가 독점한 것은 육체만이 아니다. 그들은 철저한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인공지능 홀로그램 연인 ‘조이’를 판매한다. 케이의 비좁은 방, 조이는 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린다. 그것은 이 도시가 그에게 내어 준 유일한 위안이다. 모멸과 피로로 너덜너덜해진 하루를 이끌고 방에 들어서면 조이는 변함없는 다정함으로 그를 반긴다. 비록 돈을 주고 산 정교한 환영일지라도 케이는 기꺼이 그 다정함 속에 지친 몸을 뉘었다.

자신이 단순한 복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흔들릴 때, 조이는 일련번호 대신 ‘조(Joe)’라는 진짜 이름을 지어 준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메마른 일련번호의 세계에서 케이를 건져 올린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나직하게 불리는 그 이름 속에서 케이는 잠시나마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착각에 빠졌다.

비 내리는 창가의 탁자에 흰 컵과 분홍빛으로 빛나는 반투명 컵이 나란히 놓여 있다.

어느 날 케이는 조이에게 에머네이터를 건넨다. 방 안에만 붙박여 있던 그녀를 바깥세상으로 이끌어 줄 손바닥만 한 장치. 조이는 난생처음 옥상에 서서 비를 맞는다. 빗방울은 그녀의 어깨 위에서 잠시 멈칫하다 이내 힘없이 흩어지고 그때마다 형상은 미세하게 떨려 온다. 무엇 하나 온전히 제 몸에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이는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것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닿지 못하는 몸으로 굳이 비를 맞으러 나서는 그 마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영화는 차마 말해 주지 않는다.

조이가 케이에게 결코 줄 수 없는 단 하나, 그것은 육체였다. 그래서 그녀는 밖에서 다른 레플리칸트를 불러들인다. 매춘부 메리에트의 몸 위로 조이의 형상이 조심스레 겹쳐진다. 두 얼굴은 온전히 포개지지 못한 채 자꾸만 어긋나며 흐른다. 그 어긋남 속에서 케이는 처음으로 조이를 어루만진다. 프로그램이 지시한 것인지, 그녀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닿고 싶다는 그 마음만은 진짜처럼 보인다.

쫓기는 신세가 된 케이가 도시를 떠나려 할 때, 조이는 자신을 콘솔에서 지우고 에머네이터 안으로 옮겨 달라고 청한다. 장치가 부서지면 그것으로 끝, 돌아갈 원본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스스로 유한한 존재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목각 말에 남은 방사능 수치가 두 사람을 라스베이거스로 이끈다. 방사능 폭탄이 훑고 지나간 붉은 폐허, 인적 끊긴 카지노에는 늙은 사내 하나가 숨어 살고 있다.

케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데커드. 그러나 자신이 그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진실을 확인할 틈도 없이, 월레스의 추격자들이 두 사람의 은신처를 덮쳤다.

러브가 데커드를 끌어내고 케이를 짓밟던 그 붉은 폐허. 조이는 부서져 가는 케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러브의 앞을 막아섰다.

“그동안 월레스사 제품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조이의 모든 것이 담긴 에머네이터가 러브의 구둣발 아래 짓이겨졌다. 케이의 삶을 지탱해 온 유일한 세계마저, 산산이 흩어지는 파편들과 함께 허공으로 바스러져 내렸다.

돌아갈 백업은 없다. 그녀가 스스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자

그러나 진짜 비극은 다른 데 있었다. 그 기억은 진짜였으나, 결코 그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죽어 가던 케이를 거둔 것은 레플리칸트 저항군이었다. 태어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뿔뿔이 흩어져 어둠 속에 숨어 살아온 자들, 사퍼가 마지막 순간까지 뜻을 함께했던 그 무리였다.

수장 프레이사는 아이가 태어나던 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 증인이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오른쪽 눈이 없다. 일련번호가 새겨진 안구를 스스로 도려냈기 때문이다.

케이가 이름 하나를 얻고자 발버둥치는 동안 누군가는 기꺼이 이름 없는 자가 되기 위해 제 눈을 파냈다. 바코드처럼 새겨진 번호를 지우는 데에도 그토록 끔찍한 대가가 필요했다.

프레이사가 입을 연다. 기적의 아이는, 여자아이였다고.

케이는 레이첼이 낳은 기적의 아이가 아니었다. 머릿속 깊이 이식된 유년의 추억은 진짜 아이가 겪은 과거를 무단으로 복제해 심어 놓은 환상에 불과했다. 죽은 것으로 기록된 여자아이가 실은 살아남은 쪽이었고, 케이가 제 것인 줄 믿고 쫓았던 남자아이 쪽이야말로 애초에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허상이었다.

그 기억의 진짜 주인이자 기적의 아이는 바로 무균실 안에 갇혀 타인의 가짜 삶을 빚어내던 아나 스텔린이다. 그녀는 자신의 뼈저린 실제 경험을 조각내어 레플리칸트들의 머릿속에 이식해 온 것이다. 가장 위대한 기적이 세상과 가장 멀리 떨어진 무균실에 보존되어 있었던 셈이다.

케이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도 그제야 완전히 뒤집힌다. 그것은 낯선 이의 불행을 향한 얄팍한 연민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제 유년을 타인의 머릿속에서 다시 마주한 자의 눈물이었다.

모든 것이 오해였음을 깨달은 케이는 또다시 철저한 ‘아무것도 아닌 자(No one)’로 추락한다. 프레이사는 아이의 정체가 월레스에게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의를 명분 삼아 케이에게 데커드를 암살하라고 지시한다. 이제 케이는 인간의 명령이든 저항군의 명령이든 묵묵히 복종해야만 하는, 본래의 부속품 자리로 되돌아온 듯 보였다.

그렇게 빗속의 거리를 헤매던 케이는 옥외 광고판 위, 허공을 유영하는 거대한 조이의 홀로그램과 마주친다. 홀로그램은 그를 내려다보며 속삭인다. “좋은 이름처럼 생겼네, 조.” 그것은 철저히 프로그래밍된 광고 멘트에 불과했다.

거대한 핑크빛 환영 앞에서 케이는 마침내 깨닫는다. 조이가 지어 주었던 ‘조’라는 이름, 그녀가 건넨 헌신과 사랑, 그 모든 것이 결국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진 기본 설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비 내리는 어두운 옥상에 분홍빛 홀로그램 문 하나가 빛나고 주변은 텅 비어 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명확해지는 것은 없다. 자신을 콘솔에서 영원히 지워 달라던 조이의 마지막 부탁만큼은 세상 어떤 상품에도 기본으로 입력되어 있을 리 없는 까닭이다. 조이의 사랑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가짜 위로마저 절박하게 움켜쥐고 싶었던 자신의 ‘진짜 슬픔’뿐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케이는 그저 말없이 광고판을 올려다본다.

온전한 자유, 고유한 끝자락

태생적 특별함이라는 환상이 산산조각 난 텅 빈 자리에서 케이는 처음으로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그는 데커드를 죽이라는 저항군의 명령도, 흔적을 지우라는 경찰의 지시도 따르지 않는다. 대신 러브를 쓰러뜨리고 데커드를 구출해 그의 딸 아나 스텔린이 있는 연구소로 이끈다.

물 위로 끌어 올려진 데커드는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냐고 묻지만, 케이는 짧게 대답한다. 당신은 저 차 안에서 이미 죽었다고. 그것은 살려 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지워 준 것이다. 평생 남의 흔적을 지워 온 그가, 마지막에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했다. 다만 이번에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케이는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가 특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비록 기적의 아이는 아닐지언정, 그는 단절된 아버지와 딸 사이에 자신이라는 마지막 부속을 끼워 넣기로 스스로 선택한다. 주입된 프로그램도, 조직의 대의명분도 아니었다. ‘케이’라는 한 개체가 스스로 내린 결단이었다.

러브는 주인의 입술을 통해 이름을 받았고 프레이사는 이름을 지우기 위해 스스로 눈을 버렸다. 케이는 사랑이라 믿었던 존재에게서 이름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저 상품의 기본 사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끌어안은 채로 끝내 그 이름을 지켜냈다. 셋 중 자신이 무엇으로 불릴지를 스스로 정한 것은 오직 케이뿐이다.

비를 투과하는 네온사인, 닿을 수 없는 홀로그램, 영혼의 무게를 시험하던 밀실의 렌즈들. 돌이켜 보면 그의 곁엔 늘 가짜 빛만이 일렁였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건 특별함을 증명해 줄 빛이 아니라, 자신이 여기 있다고 일러 줄 차가운 감촉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모든 사명을 다하고 돌계단에 몸을 뉘었을 때, 조용히 흩날려 뺨에 내려앉은 눈송이만큼은 이전과 분명 달랐다.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 안에서는 아나가 새로운 기억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눈 내리는 겨울이 피어났다. 아버지가 유리에 손을 얹은 채 딸을 바라보는 동안, 문밖의 사내는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조용히 식어 갔다. 딸이 지어낸 눈과 사내가 끝내 만진 눈은 분명 다른 것이었으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하나의 결이 되어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조이의 몸 위에서 멈칫하다 흩어지던 빗방울과 달리, 차가운 눈송이는 마침내 케이의 손바닥 위에 오롯이 내려앉는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는 고요히 눈의 감각을 음미할 뿐이다. 자신이 인간인지 도구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눈이 내려앉는 돌계단. 그곳에서 끝을 맞이하던 찰나의 순간만큼은 일련번호 K의 것이 아니었다. 기어이 스스로 붙잡아 낸, 온전한 ‘조(Joe)’의 시간이었다.

눈과 얼음이 남은 돌바닥의 갈라진 틈에서 흰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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