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ONAL JOURNAL
BY NAP LEE
Nap Lee.An archive of notes and tastes
WORDS, WORK
& THINGS IN BETWEEN

3개월 차 신입은 아직 판단 중이다

급한 건이 아니면 질문을 금요일까지 모아두는 3개월 차 신입의 기록.

3 Months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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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금요일에만 할 것

나는 급한 건이 아니라면 항상 질문을 금요일까지 모아둔다.

휴일을 앞둔 덕분인지 금요일의 사수는 평소보다 기분이 한결 나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근무 중 생기는 의문들을 그때그때 입 밖에 내는 대신 메모장 한구석에 적어두었다가 주말을 앞둔 날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지난달 자료와 이번 달 자료의 차이는 무엇인지, 반복되는 작업에 정해진 일정이나 명확한 기준이 있는지. 어떻게 보면 자잘한 질문들.

하지만 금요일이 됐다고 해서 돌아오는 대답까지 부드러워지는 건 아니었다. 이미 메일로 안내한 걸 왜 다시 묻느냐는 핀잔이 돌아왔고, 사수의 표정은 이내 굳었다.

내게 쏟아진 건 무수한 참조 메일이었다. 나는 그 속에서 어떻게든 업무의 흐름을 짚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십중팔구 그 메일 어딘가에 내가 놓친 문장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분명 내 잘못인 순간도 있었고, 묘하게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든 나는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숙이는 죄인이 되었다.

놓친 대목을 찾으려 허둥지둥 메일함을 뒤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사과를 먼저 건넬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지 저울질하기 바빴다.

메일 사이에서 일을 배우는 법

입사할 때부터 잘 정돈된 매뉴얼 따위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지시만큼은 조금 더 명확하길 바랐다.

사수의 설명은 늘 스쳐 지나갔다. 일의 맥락이 차례로 이어지는 대신 지시만 툭툭 끊겨 도착했다.

나는 부지런히 적었다. 지나간 메일을 다시 열어보고 흩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며 어떻게든 납득하려 애썼다.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사수의 눈에는 이미 일러준 작업을 재차 묻는 답답한 후배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 놓친 일은 더 큰 수습거리로 돌아왔다. 그 빈틈을 메우느라 퇴근은 한없이 늦어졌고, 현장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집까지 끌고 온 밤도 적지 않았다.

내가 쏟은 노력의 방향이 과연 옳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책망이 거듭될수록 나는 엉킨 일의 흐름을 짚어보는 대신 내 능력을 탓했다. 내가 업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린 건지, 애당초 제대로 된 설명이 있긴 했는지, 아니면 그저 총체적 난국인지 알 길이 없었다.

뭐, 까라면 까는 게 직장인의 숙명이라지만. 무엇을 왜 하는지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손발만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피로를 남겼다.

그래도 일은 마음에 들었다

일 자체는 퍽 마음에 들었다. 교통 현장 제어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부품을 교체하거나 프로그램을 다시 세팅하는 과정은 내가 이따금 즐기던 컴퓨터 조립과 제법 닮아 있었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장치라도 막상 덮개를 열어보면 저마다 역할을 맡은 부품들이 정직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홀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좋았다.

온종일 서울 한복판에서 운전대를 쥐어야 하는 고단함은 있었지만 정해진 자리에 못 박힌 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장을 오가는 편이 내 성향에 훨씬 잘 맞았다.

팀원들과의 관계가 크게 버거운 것도, 회사의 모든 것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가 더 어려웠다.

사수 역시 고충이 클 터였다. 제 몫의 업무를 쳐내면서 신입까지 챙기는 일이 결코 만만할 리 없으니까.

적어도 우리는 일을 주고받는 방식이 어긋나 있었다. 나는 당장 누구의 잘못인지 단정하는 대신, 그저 서로를 지치게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다음 질문들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퇴사하고 싶은 날

유난히 억울하고 버거운 날이면 어김없이 퇴사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무작정 채용 사이트를 띄워놓고 화면 속 다른 세계를 기웃거렸다. 지금보다 나은 곳이 과연 있을까. 내게 조금 더 잘 맞는 환경이란 게 존재하기는 할까.

그러다 문득, 나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이유를 억지로 쥐어짜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단 한 곳에도 이력서를 밀어 넣지 못한 채 조용히 창을 닫았다.

내가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도망치려는 건지, 아니면 진작 떠났어야 할 이유를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매달 월급이 들어와야 생활을 꾸릴 수 있었고, 가족을 위해 내가 감당해야 할 몫도 있었다.

그렇다고 사수와의 관계가 저절로 나아지기를 바라며 버티는 게 옳은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컴퓨터를 켜지 않는 밤

마지막으로 무언가에 깊이 빠져본 게 언제였는지조차 아득했다. 퇴근 후 방에 쓰러져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다가, 쫓기듯 내일을 준비하는 날이 늘었다.

한때는 취미가 많았다. 아이패드를 집어 들기만 해도 할 것들이 쏟아졌다.

아무 생각 없이 드로잉을 하거나 밀리의 서재를 켜고 눈에 띄는 대로 책을 골라 읽었다. 카페에 나가 아이패드를 펼쳐놓고 커피 한 잔과 함께 두서없는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던 날도 많았다.

방 한쪽에는 프로젝터가 놓여 있다. 하얀 벽에 비친 넷플릭스 화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삶이 제법 즐거웠다.

그리고 컴퓨터. 그 앞에 앉으면 게임이든 작업이든 몇 시간이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기기들은 방구석에 조용히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급기야 나는 컴퓨터의 전원 스위치조차 누르지 않게 됐다.

이 무기력이 흔히 말하는 번아웃인지, 그저 고된 하루가 남긴 찌꺼기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이제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하루의 문을 닫는다.

입사한 지 이제 석 달. 고작 석 달밖에 지나지 않은 걸까, 벌써 석 달이나 버텨낸 걸까.

다만 까맣게 죽어 있는 모니터 앞에서 전원조차 켜지 못한 채 밤을 흘려보내는 일이 늘어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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