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달콤한 출근이여

오늘 하루, 내게 빈틈이란 없을 것이다.

투구와 방독면을 쓴 인형이 가방을 메고 사무실 복도를 걷는다. 뒤편 의자에는 공구함과 감긴 케이블, 상자가 놓여 있다.
Ceremonial M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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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부재

울려라, 알람. 아직 밤이 길다고 주저하지 마라. 내 몫의 휴식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이 나 없이 돌아가도록 무려 여섯 시간이나 방치했으니, 이제는 일어나 그 기나긴 부재를 만회해야 한다.

씻고 머리를 말린 다음 어제 의자에 걸어둔 옷을 집어 들었다. 머리를 밀어 넣고 두 팔을 뻗는 순간 목 앞이 바짝 조여왔다. 거울을 보니 목 뒤에 있어야 할 상표가 턱 밑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두 팔을 빼고 고개를 숙여 옷을 도로 벗었다. 문밖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한 건을 해결했다. 오늘 하루, 내게 빈틈이란 없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온 찬바람에 찔끔 눈물이 났다. 굳이 소매로 훔쳐내지 않았다. 이 완벽한 아침에 어울리는 아주 적절한 습도였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큰길에는 벌써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 앞에서부터 브레이크등이 하나씩 들어오길래 나도 페달 위로 발을 옮겼다. 다들 좁은 차 안에 앉아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앞차 뒷유리 너머로 누군가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룸미러를 보며 뻗친 머리를 꾹꾹 눌러 보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앞의 앞차가 움직이고, 앞차가 움직이고, 이윽고 나도 움직였다. 아무도 숫자를 세지 않았건만 뒤차 역시 정확한 박자로 따라붙었다. 이 거대한 행렬에 빈틈 하나 내지 않고 나까지 끼워 주다니. 이런 아침을 두고 어떻게 집에 누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출근 기록기에 손가락을 댔다. 삑, 하는 단호한 기계음과 함께 화면에 내 이름이 떴다. 됐다. 오늘도 내가 출근했다는 사실이 정식으로 기록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방을 내려놓으며 힘차게 인사하자, 먼저 온 동료가 커피잔을 들다 말고 손을 까딱였다. 뒤이어 들어온 사람도 외투를 벗으며 좋은 아침이라 말을 보탰다. 아침이 좋다는 데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뜻을 모으고 있었다.

모뎀 재부팅 후 정상

현장에 도착해 공구를 챙겨 곧장 장비함으로 향했다. 덮개를 열고 이리저리 엉킨 선들 사이를 눈으로 훑었다. 뻔한 통신 불량. 모뎀 전원선을 쑥 뽑아 들고는 속으로 느릿하게 삼 초를 센 뒤 다시 꽂아 넣었다.

잠시 기다리자 녹색 표시등이 몇 번 껌벅이더니 이내 고정되었다. 단숨에 통신이 잡혔다.

장비함 앞에 선 인형이 녹색 표시등이 켜진 모뎀의 전원선에 손을 대고 있다.

나는 닫힌 장비함 문을 손바닥으로 한 번 탁 치고 어깨를 폈다. 현장에 나와 먹통인 기계를 살려낸 것이다. 고작 전원선이나 뺐다 꽂았다는 무지한 소리는 사양하겠다. 원래 명의는 가장 원초적인 해법으로 기적을 증명하는 법이다.

‘모뎀 재부팅 후 정상.’

작업 내용란에 적어 놓고 보니 한 줄조차 채우지 못한 분량이었다. 나는 ‘정상’이라는 단어 밑에 줄을 그었다. 이내 펜촉에 힘을 주어 한 번 더 그었다.

꺼낸 물건을 차곡차곡 가방에 넣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차로 돌아와 문을 닫으니 바깥의 소음이 한풀 꺾였다. 조수석에 둔 작업일지를 다시 펼쳤다. 밑줄 두 개가 글씨보다 진했다. 나는 펜 뚜껑을 딱 소리 나게 닫았다.

한 군데 더

그때 전화가 울렸다.

“네.”

나는 방금 닫은 펜 뚜껑을 다시 열며 전화를 받았다.

“한 군데 더 봐 주실 수 있어요?”

메모지에 주소를 적고 밑줄을 하나 그었다. 아직 시동도 걸지 않았으니 펜을 놀리기에 더없이 좋은 때였다. 통화를 마치고 종이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은 뒤, 안전벨트를 당겨 매고 시동을 걸었다.

차 안에서 형광 조끼를 입은 인형이 전화를 받으며 무릎 위 메모지에 펜으로 적고 있다.

다음 현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닫아둔 가방 지퍼를 다시 열었다. 조금 전 꼼꼼하게 감아둔 케이블과 공구들이 오와 열을 맞춰 누워 있었다.

나는 가지런히 말아둔 선을 다시 풀었다. 이렇게 금방 다시 꺼낼 줄 알았으면 대충 조수석에 던져둘 걸 그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떠한 순간에도 흐트러짐을 용납하지 않는 나의 숭고한 직업의식이 가끔 이렇게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을.

이번에는 유심을 뺐다. 손끝으로 잡고 한 번 훅 불었다. 방향을 맞춰 제자리에 다시 끼웠다. 신호가 돌아왔다. 한동안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지만 통신은 멀쩡했다. 훌륭했다.

조치한 내용을 휘갈겨 적고 물건을 대충 쓸어 담았다. 운전석에 오르려다 말고 다리를 한 번 쭉 폈더니 무릎에서 뚜둑 소리가 났다. 도로 무릎을 접어 차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작업 내용을 정리하던 중 다음 장소에서 연락이 왔다. 메모하던 줄 아래에 새 주소를 적고, 상대가 덧붙이는 말을 그 옆에 받아 적었다. 통화가 끝나갈 무렵 수화기 너머에서 내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네.”

입이 먼저 대답했다. 손은 아직 앞선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메모지를 접어 둔 뒤 다시 출발했다.

차에서 내려 가방을 열고 장비 상태를 확인했다. 전선을 뺐다 꽂고, 덮개를 닫고, 다시 차에 올랐다. 조금 전 오른편에 있던 햇빛이 어느새 왼쪽 창문으로 비껴 들어오고 있었다. 차에서 내릴 때마다 발을 뻗어 신발 끈이 풀리지 않았는지 살폈다. 단단히 묶여 있었다. 이 정도면 얼마든지 더 걸을 수 있었다.

몇 번 내리고 올라타고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차창 밖이 어둑해져 있었다. 조수석에 던져둔 메모지는 앞뒷면이 모두 글씨로 빼곡했다.

준비도 정상

퇴근 전 사무실에 들렀다. 내일 현장에 챙겨갈 자재를 발밑에 모아두고 오늘 한 일을 전산에 입력했다. 모뎀 재부팅. 유심 재장착. 정상 확인. 밖에서는 내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폈지만, 여기서는 엔터 키 한 번이면 다음 장소로 넘어갔다.

나는 빠진 내용이 없는지 화면을 훑어보았다. 구겨진 메모지를 펼쳐 뒷면의 기록도 마저 옮겨 쳤다. 저장을 누르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여기저기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저마다 외투를 꿰어 입고 가방을 멨다. 모니터가 하나둘 꺼졌다. 퇴근하려고 가방을 멘 동료가 내 발밑의 자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일 것도 다 챙겼네요. 이제 가시죠.”

“네. 이것만 마저 정리하고요.”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이윽고 다른 사람도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남은 직원이 스위치에 손을 얹고 불을 끌지 물었을 때,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만 들어 괜찮다고 했다. 그는 내 자리 위의 센서등만 남겨둔 채 문을 닫았다.

탕비실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내일 갈 곳을 새 종이에 옮겨 적었다. 맨 위에 내일 날짜를 적고, 챙겨야 할 자재를 그 아래에 나열했다. 목록과 미리 빼둔 물건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하나씩 맞췄다. 빠진 것은 없었다. 종이를 자재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준비도 정상.

불이 켜진 책상 앞에서 인형이 케이블과 공구 가방 옆에 종이를 올려놓고 있다.

차 안에서 몇 번이나 열고 닫았던 펜 뚜껑을 끝까지 밀어 끼웠다. 내일의 나는 이것들을 들고 나서기만 하면 된다.

참으로 빈틈없는 하루

외투를 입고 가방을 멨다. 의자를 밀어 넣으려다 말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알람을 확인할 참이었다. 오전 여섯 시 오십 분. 오늘 아침을 깨웠던 알람이 내일도 켜져 있었다.

화면을 몇 번 더 두드려 여섯 시 오십오 분 알람을 하나 더 맞췄다. 화면에 나란히 뜬 두 개의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방을 멘 채, 나는 잠시 빈 의자에 다시 걸터앉았다. 집에 돌아가 씻고, 내일 입을 셔츠의 앞뒤를 잘 맞춰 꺼내 둔 뒤 눕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다시 여섯 시 오십 분.

참으로 빈틈없는 하루였다.

어깨에서 가방끈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끈을 당겨 고쳐 멨다. 휴대전화 화면이 꺼지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마저 멎었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왕 켜진 김에

그때 머리 위의 불이 툭 꺼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문 너머 복도의 비상구 불빛만 보였다. 한 손을 들어 허공을 대충 휘젓자 천장 불이 다시 켜졌다.

이왕 켜진 김에.

나는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찔러 넣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의자를 책상 밑으로 바짝 밀어 넣은 뒤 똑바로 섰다. 내일 아침에는 오늘보다 조금 더 힘차게 인사해야지, 다짐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어깨를 쫙 폈다. 죽어가는 모뎀 통신도 살려냈고 유심도 제자리에 꽂아 넣은 나다. 이 짧은 인사 하나 제대로 뱉어내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번에는 사무실 저쪽 끝 파티션까지 목소리가 닿았다.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내일 아침에는 이 표정까지 곁들이면 완벽했다.

내일 건넬 인사를 입 안에서 몇 번 더 굴렸다. 끝을 올렸다가 내려 보고, 첫마디에 복식 호흡으로 힘을 실었다가 마지막 글자까지 고르게 밀어내 보았다. 까만 유리문에 비친 얼굴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오라, 달콤한 출근이여.

천장의 불이 다시 꺼졌다.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두 팔을 번쩍 높이 들었다.

어두운 사무실의 센서등 아래에서 노란 스웨터를 입은 인형이 두 팔을 높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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