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옵스퀴르 33(Clair Obscur: Expedition 33) – 아름다운 세계 밖으로 걸어나오는 일

누구에게나 현실의 계절을 등지고 숨어들고 싶은 피난처가 있다.

※ 이 글은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의 핵심 설정부터 결말까지 모두 다룹니다. 결말을 직접 마주하고 싶은 분은 플레이 후에 읽기를 권합니다.

이 글의 음악 A Waltz Without Melody Nap Lee / made with S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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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아름다운 피난처

누구에게나 현실의 계절을 등지고 숨어들고 싶은 피난처가 있다. 삶의 풍경이 견딜 수 없이 가혹해질 때면 인간은 기꺼이 눈을 감고 허구의 세계로 도망친다.

누군가는 소설의 문장 틈으로 숨어들고, 누군가는 영화의 잔상 속에 웅크릴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게임 속 화면 너머로 기꺼이 발을 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눈부신 피난처는 필연적으로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이 무해한 환상 속에서 언제까지 안전할 수 있을까. 언젠가 끝내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와야만 한다면, 이 찬란한 도피처는 구원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감옥일까.

빛과 어둠, 그 선명한 명암의 대비를 뜻하는 프랑스어 ‘클레르 옵스퀴르(Clair Obscur)’.

매년 한 번씩 깨어나 거대한 석판에 숫자를 새김으로써 해당 나이의 인간들을 지워버리는 신비로운 존재 ‘페인트리스’와, 이 잔혹한 카운트다운을 끝내기 위해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게임은, 그 이름처럼 찬란한 빛과 짙은 어둠을 한 몸에 품고 있다.

이 게임이 직조해 낸 세계는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다. 매년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지워지는 비극의 대지인데도 시선이 닿는 곳마다 번번이 눈부시다. 벨 에포크풍의 아름다운 도시 뤼미에르와 부서진 대륙의 파편들, 그리고 신비를 품은 다양한 생명체들의 향연 속에서 폐허는 마치 정물화처럼 고즈넉하다.

이러한 풍경들은 종말의 징후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늑한 꿈을 닮아 있다. 눈앞에 펼쳐진 색채만이 이러한 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폐허 사이로 흐르는 다채로운 선율 역시 그 풍경에 묘한 온기를 더한다. 이 게임은 잔혹한 비극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비극을 너무나 섬세한 색채의 옷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모노리스 위에 페인트리스가 숫자를 그리면, 그 나이에 도달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지워진다. 올해의 숫자는 33. 내년에는 32, 그다음 해에는 31. 죽음은 필연의 형태로 다가오고 뤼미에르의 주민들은 매년 누군가를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매년 원정대가 꾸려지는 것이다. 이 잔혹한 카운트다운을 멈추기 위해서.

플레이를 거듭할수록 처음의 유려함은 쓸쓸한 진혼곡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지척이기에 역설적으로 눈부신 풍경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이 아름다움은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상처를 가린 천이고, 상실을 박제한 액자이며, 현실을 유예하려 촘촘히 짜 올린 서글픈 피난처라는 것을.

캔버스가 된 세계

페인트리스의 붓질은 단순한 저주를 넘어 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타포다.

이 세계에서는 붓끝에 닿은 것이 곧 현실이 된다. 죽음도, 기억도 그려 넣을 수 있고 이미 존재하는 세계마저 다시 덧칠할 수 있다. 그토록 눈부셨던 뤼미에르 자체가 누군가 그려낸 환상이었다는 진실은 붓이 멈출 즈음에야 드러난다.

이곳에서 예술은 마냥 숭고하지 않다. 세계를 창조하는 힘은 곧 세계를 가두는 벽이 되기 때문이다. 기억은 숨통을 틔워주지만 끝내 사람을 과거에 매어두고, 아름다움은 상실의 진통제인 동시에 그 상실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하게 붙드는 달콤한 족쇄가 된다.

사실 뤼미에르는 실재하는 대지가 아니라 한 폭의 그림, 즉 캔버스 안에 존재하는 세계였다. 이를 그린 사람은 그림보다 음악을 더 사랑하던 청년 베르소였다. 그는 적대 세력이 일으킨 화재로 목숨을 잃었고, 불길은 동생 알리시아의 얼굴과 목소리까지 앗아갔다. 홀로 살아남은 알리시아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깊은 죄책감으로 남았다.

하지만 베르소가 남긴 캔버스에는 그의 마지막 영혼이 얼룩처럼 배어 있었다. 어머니 알린은 그 흔적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끝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들이 아직 숨 쉬고 있는 유일한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갈라진 애도

페인트리스는 괴물이 아니었다. 매년 숫자를 그리며 세계를 지워내던 거구의 존재는 다름 아닌 르누아르의 아내 ‘알린’이었으며, 죽은 아들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못한 채 영원한 슬픔 속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처연한 영혼에 불과했다.

반면 아버지 르누아르는 달랐다. 그는 그림을 찢기 위해 직접 캔버스 속으로 들어갔다. 환상에 붙잡힌 채로 점점 시들어가는 아내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였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정말 슬퍼하고 놓아줄 수 있도록.

한 사람은 잃어버린 아이를 품에 안고 세계를 지켜내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세계를 부숴야만 남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뤼미에르의 거대한 비극은, 애도의 방식을 두고 갈라선 부모의 처절한 마음이 빚어낸 풍경이었다.

이 작품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직이 말하면서도 그 정언명령이 얼마나 잔혹한지는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화상을 입고 목소리를 잃은 채 오빠의 죽음을 자책하는 알리시아에게 현실은 결코 온화한 땅이 아닐 터다. 그곳에는 몸에 남은 화상의 흔적과 끝내 꺼내지 못한 말들,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죄책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현실을 마주하라는 말은 때로 위로가 아니라 또 하나의 폭력이 되기도 한다.

지킬 것인가, 나올 것인가

게임은 끝내 이 무거운 선택을 플레이어에게 맡긴다. 슬픔 속에 그대로 머물 것인지, 아니면 그 슬픔을 뒤로하고 밖으로 걸어 나올 것인지.

한 선택지에서 마엘은 캔버스에 남는 길을 택한다. 어머니의 붓을 쥐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그려내자 죽었던 동료들이 돌아오고, 도시는 다시 찬란한 빛을 되찾는다. 얼핏 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하다. 하지만 되살아난 베르소는 오페라 하우스의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거부하며 끝내 저항한다. 이미 떠나기를 원했던 그에게 이 부활은 구원이 아니라, 원치 않는 삶으로 다시 끌려온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객석에 앉은 마엘의 눈가에는 물감이 짙게 번져 있다. 아들을 붙잡으려다 끝내 자신마저 잃어버린 어머니의 얼굴과 꼭 닮은 모습이다. 죽은 자를 놓아주지 못한 채 다시 붙잡고, 산 자마저 그 안에 남아버린다.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세계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야 간신히 모습을 유지한다.

다른 선택지의 끝에서 베르소는 그림을 찢는다. 캔버스가 무너지자 그 안에 있던 모든 것도 신기루처럼 흩어진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과 되찾았다고 믿었던 생명은 눈부시던 풍경과 함께 자취를 감춘다. 마엘에게는 이미 한 번 잃었던 이들을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처음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든 이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느 쪽도 온전한 해피엔딩일 수 없다. 그림을 지키면 산 자의 시간이 정지하고 그림을 부수면 재차 모든 것을 잃는다. 이 잔혹한 선택 앞에서 과연 캔버스를 찢는 것만이 제대로 된 애도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마엘이 돌아가야 할 현실은 자책과 침묵만이 가득한 지옥이었고, 오직 그림 속에서만 그녀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그 선택을 우리가 감히 비겁하다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게임은 답을 성급히 재단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세계에 주저앉은 이를 탓하지 않고 그곳을 부수고 나온 이를 무조건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누군가는 기억 자체를 삶으로 삼았고, 누군가는 폐허가 된 기억을 안은 채로 삶을 다시 이어가고자 결정했을 뿐.

그림 밖으로 나온 후 가족은 현실 속 묘비 앞에 서 있다. 장엄한 선율도, 마법 같은 부활도 없다. 풍경은 한없이 평범하고, 내리쬐는 햇살은 지극히 담담하다. 그들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마침내 제대로 슬퍼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그들은 묘비에서 등을 돌리고 다시 일상 속으로 걸음을 옮길 것이다. 허기를 채우고, 잠을 청하고,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한 폭의 명화 같은 색채는 아닐지언정, 그럼에도 아침은 찾아온다. 누구도 덧칠하지 않은, 진짜 아침이.

그림 밖의 아침

나에게도 그런 캔버스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붙잡아온 아늑한 상상들 말이다. 현실의 표면이 견딜 수 없이 거칠어질 때면 나는 잘 짜여진 세계 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그곳에서는 폐허마저 우아했고, 실패조차 나름의 질서를 품고 있었으며, 헐벗은 상실마저 기어이 서정적인 색채를 입었다.

그래서 이제는 타인의 도피를 함부로 비난하지 못한다. 어떤 피난처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잠시 몸을 기대는 곳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때로는 허구가 먼저 숨을 돌리게 해주고, 그제야 다시 현실을 견딜 힘이 생기기도 하니까.

다만 명확한 것은, 오래 머물렀던 세계는 기어코 자신을 닮아간다는 것. 내가 빚어낸 문장과 품어온 세계, 거듭 찾아간 수많은 서사는 위로인 동시에 나를 옭아매는 무거운 닻이 된다. 그 안에서 나는 조금 더 안전하고, 덜 망가진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바로 그 무해함 때문에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지만 떠난다는 것과 부정한다는 것은 다른 일이다. 결국 그림은 찢어지고, 음악은 멎으며, 문장은 지워진다. 그래도 그 안에서 한순간이나마 따뜻했던 마음까지 바스러지는 것은 아닐 테다. 불이 꺼진 뒤에도 빛은 한동안 눈에 남는다. 그러니 그곳에서 쬔 찬란한 빛을 품은 채로, 다시 문밖으로 걸어 나가면 된다.

어쩌면 현실로 돌아온다는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을 믿지 않는 일이 아니라, 아름다움 없이도 하루를 담담히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마주한 저녁빛이 또 하나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정경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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