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ONAL JOURNAL
BY NAP LEE
Nap Lee.An archive of notes and tastes
WORDS, WORK
& THINGS IN BETWEEN

네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부탁을 들어주되 너무 쉬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 문장. 답장을 고치는 동안 명단은 완성됐고, 대화창은 하나 더 늘었다.

투구와 방독면을 쓴 캐릭터가 명단이 놓인 책상 옆에서 종이를 들고 있고, 위로 커다란 빈 말풍선이 떠 있다.
I Said Yes
0:00

쓰다 만 답장

네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답장을 미뤄두고 첨부파일부터 열었다. 지인이 행사 명단 정리를 부탁해 온 참이었다. 오늘 저녁 당장 필요한 터라 시간이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다는 말이 덧붙어 있었다. 지난번 일 처리가 깔끔해 다시 연락했다는 인사도 함께였다.

명단에는 동일 인물이 두 번씩 적혀 있었다. 이름만 있는 데이터와 전화번호까지 있는 데이터가 섞여 있길래 번호가 있는 쪽만 남겨두었다. 이름 사이의 어색한 공백들을 지워내는 것으로 정리는 끝났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작업을 마친 나는 쓰다 만 답장으로 돌아왔다.

푸른 창가에서 철제 투구와 방독면을 쓴 인형이 바른 자세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네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읽는 순간 자세가 반듯해지는 문장이었다. 분명 부탁을 들어주는 쪽인데도 어쩐지 지시를 받은 사람 같았다. 나는 문장을 복사해 GPT에게 물었다.

“이거 너무 딱딱해?”

“조금 사무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마지막에 느낌표를 붙이면 더 부드러워져. ‘네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느낌표 하나로 내가 꽤 의욕적인 사람이 됐다. 명단을 정리해줄 수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너무 신난 것 같아.”

“그럼 ‘네, 알겠어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는 어때?”

나는 ‘알겠어요’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건네는 듯한 대답이었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이야. 상사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로 놔두는 게 무난하지.”

잠깐 외출했던 ‘알겠습니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그 앞에 쉼표를 찍었다가 도로 지웠다. 모니터 속 엑셀 창에서는 여전히 이름 하나가 파랗게 선택되어 있었다.

“공손한 건 좋은데, 너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언제까지 뭘 해줄 수 있는지 명확히 밝혀. 네 일정에 맞춰 돕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그 말에 수긍하며 나는 파일 끝까지 화면을 내렸다. 중간중간 비어 있는 줄을 지우고, 합계조차 없는 명단의 인원수를 직접 세어 맨 아래에 적었다.

“오늘 여섯 시까지는 가능할 듯.”

“그럼 이렇게 보내는 게 자연스러워. ‘네, 명단 확인해서 여섯 시까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복사해 대화창에 붙여넣었다. 곧장 전송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명단 확인

위에서 내려다본 명단 두 장 위에서 흰 목장갑을 낀 손이 중복 항목을 짚고 있다.

명단 확인.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같은 이름이 두 번 들어갔는지 정도였다. 이 사람들이 실제로 행사에 참석하는지, 전화번호가 맞는지까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내용 확인은 못 해. 그냥 정리만 하는 거야.”

“그럼 작업 범위를 구체적으로 적어 주는 게 좋겠어. ‘보내주신 명단에서 중복 항목과 서식을 정리해 여섯 시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하고.”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사람이 아니라 작은 외주 업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쓰면 딱 그것만 해 주겠다는 것 같잖아.”

“그것만 해 줄 생각인 건 맞지?”

“일단은.”

흰 목장갑을 낀 캐릭터가 사무용 카운터 뒤에서 길게 늘어진 계약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본다.

GPT는 작업 범위와 마감 시각, 추가 수정 가능 여부를 나누어 제시했다. 나는 세 번째 항목까지 읽고 손을 뗐다. 인사를 조금 부드럽게 하려던 것뿐인데 계약 조건을 검토하고 있었다.

“견적서 보내는 거 아님.”

“그럼 범위 설명은 빼고 ‘네, 여섯 시까지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도로 줄여도 돼.”

“그러면 이것저것 더 해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추가 요청이 들어오면 그때 상황을 봐서 거절하면 되잖아.”

누구 편이야

나는 가만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GPT는 늘 다음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처리하자고 했다. 물론 그때 가서 그걸 처리해야 하는 사람은 결국 나였다.

“그때 가서 또 너랑 이러고 있어야 하잖아.”

그 사이 명단의 열 너비를 맞췄다. 전화번호 끝자리가 잘리지 않게 폭을 조금 늘리고, 제목을 가운데로 정렬했다. 보기에 한결 나았다. 파일 이름 뒤에 ‘정리’라는 단어를 붙여 저장했다.

“이번 답장 한 번으로 앞으로 밀려올 부탁까지 다 막아내긴 어려워. 이번 일을 할지, 한다면 선을 어디까지 그을지부터 확실히 정해. 그럼 문장도 간단해져.”

“한다고. 처음부터 한다고 했잖아.”

“응. 그럼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면 돼.”

“너 지금 도대체 누구 편이야?”

“네가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억울하게 부담을 떠안지 않도록 돕는 중이지.”

“근데 네가 불러준 대로 적다 보면 부탁하는 쪽 입장만 너무 편해지는 것 같아서 그래.”

“상대가 네 의도를 쉽게 이해하는 건 좋은 일이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부탁을 들어주되 내가 너무 쉬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 문장. 그러면서도 상대가 내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고 느끼지는 않을, 그런 적당한 문장.

새로운 대화창

흰 목장갑을 낀 두 손으로 든 휴대전화 화면에 새 알림 말풍선이 떠 있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바쁘신가 보네요. 다른 분도 봐주실 수 있다고 해서 일단 파일 보내뒀어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나는 화면에 띄워둔 엑셀 창을 보았다. 이름은 가지런했고 전화번호는 잘리지 않았으며 맨 아래에는 총인원까지 완벽하게 들어가 있었다.

나는 곧바로 메신저 창을 열어 복사해 두었던 문장을 지워버렸다.

[아닙니다. 제가 거의 다 했으니 마저 정리해서 보내드릴게요.]

답장은 곧장 날아왔다. 상대는 고맙다며 그럼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가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했다.

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그 사람도 벌써 엑셀에 손을 댔으면 어떡하지?’

버전이 다른 명단 두 개가 굴러다니는 건 최악이었다.

[연락처 주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분이 하신 거 있으면 같이 맞춰보겠습니다.]

넓은 공간 오른쪽에 작게 앉은 캐릭터의 책상에서 빈 말풍선들이 길게 이어져 돌아온다.

상대가 흔쾌히 전화번호를 넘겼다. 나는 새 번호를 저장하고 낯선 프로필의 대화창을 열었다. 커서만 깜빡이는 텅 빈 화면을 노려보다가, 결국 다시 GPT 창을 띄웠다.

“이제 그 사람한테 보낼 말도 좀 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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